주후 70년, 예루살렘에 대한 로마 장군 디도의 총공격이 개시되었다. 그야말로 돌 위에 돌 하나가 남지 않은 처절한 살육과 파괴로 끝이 났다.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고, 매일 3천명을 회개시키며 성장하는 예루살렘교회도 풍비박산이 났으며, 사도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각 지역에 산재해 있던 디아스포라들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처절한 예루살렘의 비극이 교회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주님의 승천과 성령강림에 힘입은 사도들의 열정적인 목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유무상통의 지상천국으로, 매일 성장하는 안정된 대형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 시점에 사도바울은 불편한 육신을 이끌고 소아시아를 누비고 있었다. 그런 바울을 바라보는 예루살렘의 시각은 불편했으며, 도와주고 협력하기는 했으나, 스스로 나서서 바울처럼 맹렬히 이방전도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 서운함과 분노는 주님의 몫이었다. 주님은 로마를 동원하여 예언하신 대로 예루살렘 교회를 철저히 부수심으로 열방선교의 위대한 지상명령이 달성되도록 하셨다.

추측해보건데 만일 주님이 예루살렘 교회를 그대로 두셨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가 바울 한 사람의 헌신으로 이루어졌을까?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붕괴 이후 소아시아 일대로 숨어든 사도들과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초대교회와 속사도 시대의 교회는 절정의 성장기를 맞게 되고 결국 이것이 로마를 정복하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계화로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엄연한 하나님의 의지가 철저하게 반영된 사건이었다.

한국교회로 돌아온다. 수십만을 거느린 기업형 대형교회들이 흩어지기를 거부하고 오직 자기교회 지키기와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논자는 건전한 대형교회를 비난하거나 문제삼을 생각이 없으며, 그 목회자들에 대한 존경에 무리가 없다. 문제는 교회 크기가 아니라 교회의 역할과 순수성이다. 아무리 교회가 작아도 그 역할이 무당과 점집의 수준이요 그 가르침과 덕이 교회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라면 다툴 여지도 없다.

그러나 필자가 굳이 대형교회를 문제삼는 것은 작은 교회들의 허물은 밝혀지지도 않고, 밝혀져도 사회적 선교적 영향이 미미하나, 대형교회는 허물의 소문 그 자체로 한국교회 전체가 휘청거리고, 허물이 사실로 들어날 때 입는 피해와 손실은 계산하기 힘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살피건데 한국교회를 살리는 것은 대형교회의 진정성있는 소형교회 살리기 노력과 소형교회의 내실있는 성장노력이다. 이를 위하여 필자는 다음 다섯 가지를 다시 주장한다.

첫째 대형교회들은 장애, 노약자를 위한 서비스를 제외하고, 주일버스운행을 중단하라.

둘째, 대형교회들은 일정한 거리 밖의 성도들은 지역 교회로 옮기도록 권고하라.

셋째. 교회 직할의 복지시설 및 수익사업들을 전문단체 혹은 공공기관으로 넘겨주고, 설립 당시와 똑 같은 지원체제를 유지하라.

넷째, 소형교회들은 성장목표를 300명으로 하고, 500명이 넘으면 나누겠다고 선포하라.

다섯째, 외형의 번듯한 교회 건축을 포기하고, 아름다운 내면의 교회 건축을 약속하라.

곳곳에서 한국교회의 현실적 위기를 벗어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각종 노력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음이 기쁘다. 그러나 이 물결이 단순한 이벤트식 행사와 토론이라면 뜻있는 자들의 더 큰 공분에 직면할 것이다. 지금은 논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행동이며, 특별히 대형교회들의 감당하기 힘든 정도의 모범이 없으면 우리의 모든 논의는 의미없는 소리가 되고 만다. 이 시대적 주의명령을 거부하고 현실에 계속 안주할 때 하나님이 준비하실 이 시대의 디도장군의 군사가 문 앞에 이르렀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토록 필자가 오해를 무릅쓰고 고집스럽게 대형교회를 허물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 임을 호소하는 바이다.

전 그리스도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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