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 인 찬 목사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이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새 해에 들 때마다 올 한 해에 이것만은 기필코 지켜야지 하고, 다짐을 하지만 하루 이틀 가는 사이에 잊히고 만다. 2014년도의 작심(作心)도 그랬다.

요즘 들어 극심한 불경기를 맞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몹시 각박하고, 거칠어지고 있다. 건들면 폭발을 준비하고 있었듯이 신경들이 날카롭다. 이런 때일수록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이 소중한 때다. 민족의 스승 도산선생의 때가 여유 있는 시절이 결코 아니었다. 죽지 못해 살던 그 시절에 도산선생은 ‘훈훈한 마음과 빙그레 웃는 얼굴’을 강조하고, 격려하였다. 선생께서는 일제(日帝) 하의 혹독한 시절에 도저히 웃는 얼굴로 살아가기 어려웠던 때에 훈훈한 마음을 품고, 웃으며 살자고 격려했던 것이다.

이웃의 웬만한 허물은 덮어주며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고 살자. 어쩌다가 시비꺼리가 생기거들랑 져주고 살면 어떨까? 이런 마음이 관용(寬容)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관용으로 이웃을 대하라고 거듭거듭 강조하신다.

빌립보서 4장에서의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4,5)
바울이 빌립보서를 옥중에서 썼다. 감옥에 갇힌 영어(囹圄)의 몸으로 사도는 옥중에 있으면서 옥밖에 있는 형제들에게 ‘기뻐하는 삶, 관용하는 마음’을 주문하고 있다. 일반 범인(凡人)은실천은 고사하고, 사고(思考)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주 안에서’라는 단서가 붙는다.
우리네 수준으로는 어려운 일이지만 ‘믿음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그러운 마음 즉 관용으로 그리스도인다운 넉넉함을 가지라고 하신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의 책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인들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고대 로마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적잖은 사료가 보여주고 있듯이,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로마인이라고, 로마인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들만이 그토록 번영할 수 있었을까? 커다란 문명권을 형성하고 오랫동안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로마가 번영한 그 이유를 「로마인 이야기」는 로마인의 개방성과 유연성 그리고 관용의 정신으로 요약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관용의 정신으로 로마인들은 세계를 지배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로마인들의 개방적인 태도와 포용성으로 정복한 땅과 민족들을 유연하게 통치를 할 수 있었고, 지배자로서 피정복민들의 문화, 언어, 종교를 인정하고 정복자의 문화나 언어,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다른 민족들이 그들 고유의 것을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하면서 로마라는 큰 울타리에 일원이 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탁원한 인재를 찾아 로마 중앙정부의 관료가 되는 일에 재한을 두지 않았고, 그들이 그들의 지도자가 다스리도록 허용했다. 지금 우리가 로마인들에게서 본받아야 할 것이 이런 너그러운 관용의 정신일 것이다.

지금 새삼스레 로마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다. 로마인의 본토인 이태리 반도가 땅의 넓이로나 인구에 있어서 우리 한반도보다 별로 넓거나 많지 않았다. 한반도의 면적이 223,348 ㎢이고, 이탈리아 반도는 301,251㎢ 이며 인구는 우리민족이 약7천만인데 비해 이탈리아는 약 6천2백만이지만 이탈리아는 통일 국가이고, 우리는 분단국가이다. 그리고 이탈리아와 우리나라가 동일하게 온대 기후대에 속한다.

다 같이 반도라는 지정학적 조건에서 비슷한 넓이의 땅과 비슷한 규모의 인구를 가졌는데도 로마인들은 세계를 제패하고, 천년 대제국을 이룬 것에 비하여 우리는 반도 땅에 갇힌 채로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끼어, 기를 펴지 못한 채 우리 끼리 반목하고,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 되어 죽고, 죽이고, 헐뜯으며 살아 왔다. 무슨 차이일까?

민족이 어떻고, 민족성이 어떻고 하며 나의 부족을 민족성 탓으로 돌리고, 스스로 비하하거나 탓하고, 면피하려고 함이 아니다.

새해에는 성경이 교훈하고,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관용을 품고, 훈련하여 개방성과 유연성과 관용의 정신을 배워 더 낳은 그리스도인의 가슴을 갖고자 함이다.

의왕중앙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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