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사울왕의 추격을 피해 바란 광야에서 도피생활을 할 때이다. 다윗의 도피처에서 멀지 않은 마온이라는 마을에서 나발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큰 부자였다. 다윗은 나발을 만난 적은 없지만, 베두인족으로부터 약탈당하지 않도록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마침 양털 깎는 철이 되어 나발이 큰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다윗은 수하의 장정 십여명을 나발에게 보내 정중하게 먹을 것을 구했다. 그러자 미련한 나발은 “내가 다윗이 누군지 알게 뭐야, 이새는 또 뭐꼬. 요새 주인에게서 도망친 종놈들이 만다더구먼!”(삼상 25:10)이라고 비꼬며 문전박대했다. 다윗은 당장 장정 400명을 무장시켜 나발을 치러 길을 떠났다.

그 사이에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수하로부터 남편이 다윗을 모욕했다는 말을 듣고 경악한다. 다윗은 장차 이스라엘의 큰 지도자가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비가일은 음식을 챙겨 앞서 보내고 자기는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나발을 치기 위해 달려오는 다윗에게 나아가 엎드려 간청한다. “주인님께서는 장차 백성들의 큰 지도자가 되실 분인데, 손에 피를 묻힌다면 백성들이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니 제발 피르르 묻히지 말아 주십시오. 여호와께서는 반드시 주님에게 든든한 집으르 세워주실 것입니다”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말을 들은 다윗은 그 자리에서 분노가 사라지고 아비가일을 축복한다.

복음 안에서 진리를 옹호한다는 것은 제 고집대로 간다는게 아니다. 복음은 막힌 길을 뚫고, 원수의 담을 헐고, 사막을 옥토로 만들어간다. 만일 복음핑계로 길이 막히고, 용서 못할 원수가 생기고, 소통이 단절되고, 옥토가 사막으로 변한다면 그것은 복음일 수 없다. 평화 역시 원수를 친구로 만드는 데서 성취된다. 서로를 자극하는 말이나 행위를 삼가고, 이왕이면 좋은 말과 행동을 취해야 원수를 친구로 만들 수 있다.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며 평화를 말하는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평화일 수 가 없다. 복음은 타협하는 정신을 요구한다. /삼일교회 담임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