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도 크게 성장했으며, 성숙해졌다. 한국교회가 성장한 만큼 책임감도 무겁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서양의 지배이데올로기적인 신학에 매몰돼, 지구촌 곳곳에서 억압당하는 자, 굶어 죽어가는 자, 전쟁으로 희생당하는 자들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 곳곳에서 인간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시다. 애굽의 파라오 밑에서 압제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셨듯이 지구촌 곳곳에서 신음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역사하고 계신 것이다.

현대 서구의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인간을 억압하고, 자연의 혜택을 독점하고 파괴하는 서양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했다. 그것은 제1세계에서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이다.

성경은 “그의 의와 그의 나라를 갈망하는 자가 누구이냐. 억눌리고 가난한자가 아니냐. 그 나라는 그들의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그의 의와 그의 나라를 갈망하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증언되고, 매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복음은 지배자의 위치가 아니라, 고난당하는 자의 위치에서 선포되고, 재해석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고난의 종 예수의 형상이다. 서양의 신민지 신학과 신앙에 매몰된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사순절기간인 오늘 묵상해야 할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사실 한국개신교는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하나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성경에 대해 관념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생각해 왔다. 따라서 ‘가난도 죄’로 치부했다. 그것은 서양의 그리스도 선교가 지배자의 의식을 가지고, 지배자의 문화적 수단으로써 복음을 전파했다. 따라서 그리스도 전통은 서양 지배자 선교과정의 관념론적 이데올로기로 둔갑해 버렸다. 

이 전철을 한국교회가 그대로 밟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부자들의 종교로 변질되었으며, 가난한 이웃들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것은 해외선교도 마찬가지이다. 서양의 신학과 신앙을 제3세계 국가의 국민들에게 심어주는데 급급하고 있다. 이로 인한 선교의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것은 영미선교사들이 한국에 전해준 복음을 그대로 해외선교에 앵무새처럼 전한 결과이다. 한마디로 피선교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국민의 심성을 그리스도의 선교에 담아내지를 못했다. 오직 ‘축복’과 ‘하나님의 뜻’을 내세워 하나님의 복음을 몰각시켜 버렸다.

분명 피선교국의 사회적 상황을 외면한 복음은, 하나님의 정의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제3세계 국가의 경우, 눌린 자와 가난한 자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 또 피억압과 빈곤의 상황이 존속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성경말씀에 반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몰각한 것이며,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민족의 중심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뜻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중남미의 신부들은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민중들의 시중을 들면서, 맨주먹으로 바다의 괴물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쳤다. 영미의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와 식민지신학을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교회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가난하고, 고난당하는 이웃을 외면한 세계교회는 모두 망했다는 사실 앞에 한국교회는 겸허해져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의 일부에서 복음으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들려오는 작은 소리는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공의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하나님의 세상을 이 땅에서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분단을 극복하고, 자원과 식량을 함께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의미한다. 이 같은 길이 열리지 않으면,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종말적 도래를 증언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깨달아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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