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근열 목사
암흑기였던 중세 로마에서는 연애결혼을 엄하게 금지시켰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이도령과 성춘향처럼 남몰래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다. 금욕주의의 그 시대에 안타까운 일이였다. 이것을 알게 된 성 발렌티노 신부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알고 결혼을 시켜주었다.

결국 그 일로 인하여 성 발렌티노 신부는 2월14일 순교를 당하고 말았다. 그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사랑의 날 또는 발렌타인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날이 되면 평소 짝사랑하던 남자에게 초콜렛을 선물하여 사랑의 고백을 하는데 이때부터 한 달 후에 3월14일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을 선물하여 담례하는 이것을 화이트 데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아름답고 순고한 사랑 이야기를 어른들이 변질시켜서 과소비를 부추기는 상술이 심해졌다. 진정한 사랑은 과연 얼마나 주어야 할까? 그리고 얼만큼 받아야 할까? 사랑은 받은만큼 줘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주었다 하더라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한다.

즉, 사랑은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에 있어서 진정 중요한 것은 남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고 그것과 함께 전해지는 진정한 마음이다. 받을 것을 생각하고 주는 사랑이라면 흥정이 아닌가? 받은 만큼 주는 사랑은 거래가 아닌가? 주님 예수와 우리의 관계도 비교하면서 따져가면서 사랑을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흥정이다. 사랑은 진실의 땅에서만 자라나는 꽃이요 희생의 가슴에 맺히는 열매다. 금년 한해도 우리가 인생의 한 페이지를 살아가면서 예수님과의 사랑이 맺어질때로 맺어지는 사랑의 사람이 되자. 그 사랑은 내 몫의 십자가를 요구한다.

십자가를 쉽게 지는 비결이 하나있다. 그것은 예수에게서 배워야한다. 진리는 간단하다.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는 것이 비결이다. 사무엘 루틸포든은 말하기를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는 무겁다. 그러나 단맛이 있다. 새가 날개가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창공을 난다.

신자에게는 십자가가 주어지고 무거우나 그것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전진하게 한다. 새의 직분자들이여 사명을 감당하는 비결도 예수님 사랑 때문이길 바란다. 예수의 사랑처럼 묘약은 없다. 십자가를 질 때 아무것도 묻지 말고 져라.

빌라도는 마태복음 7장 22절에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민중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는 영원히 저주를 받았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산에 바칠 때 아내나 친구에게 묻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즉시 순종하고 믿음으로 순종하고 변함없이 순종하고 아까워도 바치는 순종까지 해냈다. 사무엘상 6장 16절에 나오는 법궤를 맨 소는 벧세메스를 말없이 울면서도 끝까지 걸어갔다. 예수님도 갈보리 십자가 산에서 그대로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도 묻지 말고 십자가를 져보자. 따지지 말고 십자가를 져보다. 계산도 하지 말고 십자가를 져보자.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져보자. 무엇을 바라고 십자가를 진다면 문제만 일으킬 뿐이다. 일꾼으로 하나님께서 시켜놨더니 일꾼은 커녕 일감이 되어버린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오늘 한국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를 억지로라도 지라. 사도행전 13장 1절에 억지로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의 자손들이 훌륭한 교회의 일꾼이였음을 명심하라. 그보다 더 예수의 십자가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사랑 때문에 주의 일을 하는 힘찬 새해가 되게 하자. 지금은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내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사회 속에서 십자가를 질때이다.

군남반석교회.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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