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 특히 왜곡된 성경관을 갖고 있는 현대 신학자들의 회의론을 경계해야 한다. 18세기 유럽에 계몽주의 철학이 퍼지면서 인간의 자율성을 강하게 신뢰하면서, 기독론의 오류와 곡해가 심각하게 초래되었다. 그 후로 현대 신학자들은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버리는 엄청난 왜곡을 거듭하였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사회복음주의 운동, 해방신학,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 등으로 이어져 오면서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이심을 왜곡하고 변질시켜 오고 있다.

독일 자유주의 신학자 알브레흐트 릿츌은 예수님은 그저 인생의 좋은 도덕교사이고, 윤리적으로 아름답게 살아가신 좋은 모델을 제시한 분이라고 축소시켜 버렸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피흘리심은 우리 각자의 죄와 죄의 형벌을 씻어버리고 면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친 성경의 교훈들을 왜곡시켜 버렸다.
 
구원이란 단지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한 상태에서 구출되는 것이라고 축소시켰다. 그에 의하면, 사람이 지성적으로 깨우치는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을 구원하는 것은 서로 화해를 맺게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찢으신 희생제사로 이룩하였다는 것을 믿음의 핵심내용으로 고백하지 않는다.

넷째, 구원의 등급이나 차등은 없다. 다만, 상급에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은 사람들이 주고받는 거래나 선물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구원은 죄와 허물로부터 죽어야 마땅한 죄인들을 건져주시고자 선포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다. 죄에 대한 진노와 형벌에서 건져주시는 구원, 그 자체에는 급수의 차별이란 전혀 없다.

세상에서 보편화된 상급의 개념이 자꾸만 구원에도 적용되어서 혼란을 일으킨다. 예를 들면,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면, 좋은 점수를 받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선한 일을 많이 하면 좋은 하늘나라에서도 상급이 높고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은혜를 적용하신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비유로 말씀 하신 예수님은 농장에서 일하는 일군들에게 품삯을 동일하게 주신다고 하였다. 마감시간 직전에 들어와서 일한 사람도 하루에 해당하는 품삯을 주셨다. 마태복음 20장 1-16절에 보면, 하루 한 데나리온의 임금을 주기로 하였는데, 해질 무렵에 들어온 사람들이나 일찍부터 나와서 일한 사람에게나 똑 같이 댓가를 주셨다. 일부는 불평했지만, 약속하신 대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되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선물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죄와 허물로 인해서 전혀 무가치한 자들이 되었고, 진노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선물로 영생을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사람들 중에서 일부이지만 살려주시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5)라고 하였다.

<끝>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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