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아침, 대지를 적시는 비가 내렸다. 갈기갈기 찢겨진 한국교회를 통탄이라도 하듯이 하늘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언제쯤 화합과 일치로 하나되는 한국교회를 이룰 수 있을지. 부활의 아침 기쁨과 희망의 햇살보다 슬픔과 절망이 드리운 그늘이 커가는 한국교회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올해는 하나가 되어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릴까라는 기대를 처참하게 짓밟듯이 분열과 갈등에 익숙한 한국교회는, 부활절 연합예배 마저도 쪼개고 또 쪼개어 산산조각 내어 버렸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새벽 5시에, 교단 주도의 부활절 연합예배는 오후 3시에,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부활절 연합예배는 오후 5시에 제각각 드리는 무리수를 뒀다. 여기에 소위 부활절 연합예배의 전통을 지킨다(?)는 모 단체도 제멋대로 시간을 정해 따로 드리는 모습은 가히 통탄을 금할 수 없다. 

도대체 뭐하는 짓인지, 그럼에도 버젓이 부활절 연합예배라고 떠드는 모습에 부끄러워 차마 얼굴을 들기 힘들 정도다. 공개적으로 망신살이 뻗친 날인데도 저마다 부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지도자들의 모습에서는 인기몰이 연예인의 모습만 있었을 뿐, 더 이상 한국교회의 희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누구를 위한 부활절 연합예배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사실 작금의 부활절 연합예배는 생명을 잃어버렸다. 부활의 십자가 신앙을 도통 찾아볼 수 없다. 말로만 부활절 연합예배를 부르짖을 뿐 부자들의 ‘돈 잔치’로 전락해 버렸다. 내로라하는 대형교단, 대형교회 담임 목사들의 집합소가 되어 버렸다. 역량이 부족한 지도자들이 순서 하나라도 차지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으며, 일명 꾼들이 등장해 속된말로 대형교회의 ‘삥’을 뜯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갖는 참의미는 사라지고, 만천하에 보여주기식 예배로 추락했다. 얼마나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부활절 예배를 드렸는지에만 관심을 둘 뿐, 어떤 의미로 드리는지는 참석한 사람들조차도 오리무중이다. 단지 모이라고 했으니 모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심지어 모 연합기관의 대표회장은 교인 동원령까지 공개적으로 발설하며, 지도자로서의 부족한 자질을 여실히 드러냈다. 누가 부활절 연합예배를 경쟁적으로 드리라고 했는지, 지도자라 자처하는 당사자에게 되묻고 싶다. 인원동원이 부활의 참의미보다도 더 중요하단 말인가. 지도자가 이처럼 경거망동하니 한국교회가 제대로 돌아갈리 만무하다.

일부는 서로 다른 시간에 드려진 부활절 연합예배를 두고, 다양성 속 일치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분열의 또 다른 단상일 뿐이다. 솔직히 과거 남산이나 여의도 광장에서 드려진 부활절 연합예배는 많은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촛불을 준비해 참석한 말 그대로 감동의 도가니였다. 누구 하나 강압에 의해 참석하거나, 각기 다른 곳에서 드려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부활절 연합예배는 행사치례로 전락했다고 보는 것이 맞는 말이다.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행사일 뿐 부활의 참 의미가 없다.

이런 식으로 드릴 거면 차라리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지 말고, 개교회에 맡겨 드리는 것이 훨씬 낫다. 굳이 대형집회로 드릴 필요 없이 소외된 이웃과 함께 조용하고 경건하게 드리는 것이 부활하신 예수께서도 원하시는 예배의 참모습일 것이다. 의례적이며, 행사치례의 예배, 연합이 아닌 거짓 연합예배, 돈잔치로 전락한 예배, 대형교회 유명한 목회자들이 앞 다투어 얼굴을 내미는 예배, 꾼들의 돈놀이, 소외된 이웃이 없이 부자들만 있는 예배 등 부활의 의미가 사라진 예배를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원치 않으신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부활의 예수를 갈기갈기 찢어 생채기를 내지 말고, 소외된 이웃을 보듬어 그들의 고통을 나누는 모습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이상 욕보이게 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외쳤던 사랑과 자유와 평등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교회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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