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 인 찬 목사
사람이 세상을 살다 보면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은 항상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급한 일을 먼저 하고, 그것에 당위성을 부여하며 애써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사실은 꼭 그렇지 않다. 급한 일은 언제나 있다. 죽는 순간에도 급한 일은 우리 앞에 있을 것이다. 급한 일 위주의 인생을 살다보면 평생을 쫓기며, 내몰리며, 초조하게만 살다가 갑자기 마지막을 맞을 지도 모를 일이다.

급한 일이 먼저가 아니고, 중요한 일을 먼저인 이유다.

우리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이후, 언제나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모여들었다. 때로는 발에 밟힐 정도로, 때로는 어깨를 서로 부딪칠 지경으로, 어떤 구름 같이 많은 무리들일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일생일대의 기회로, 죽어가면서 시급히 병을 고침받기 위하여, 혹은 그 권위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때때로 어디론가 홀로 가셔서 많은 무리들을 당혹하게 만들기도 하시고, 어느 때는 이 시급한 환자들을 조바심 나게 하시기도 하셨으며 의도적으로 그 시급함 앞에서 지체하기도 하셨다.

새벽이 되어서야, 혹은 사흘이 지난 뒤에야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면 제자들은 이 시급한 상황에, 이렇게 급한 일이 많은 때에 왜, 또는 어디에 가셨다가 이제야 오시느냐고 묻기도 했다.

우리 예수님은 환자들을 치유하는 급한 일보다도,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교제를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잠잠히 자신을 드러내놓는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셨다.

주님은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하시기 원하셨기에 그 시급한 자리를 떠나 계셨던 것이다. 당장은 다소 손해 같아 보여도 중요한 일을 먼저 하는 것, 그것이 성경이 제시하시는 인생의 지혜이다.

목사로 산지가 벌써 30년을 훌쩍 넘겨버렸다. 목사직을 천직으로 알고, 즐겁게, 감사하게 사역을 감당해 오는 중에도 지난 목회를 돌이켜 보며 아쉬운 마음, 후회하는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나름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다고 가정을 너무 소홀이 한일이다.

많은 사역자들이 대부분 그럴 거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위로를 하지만 성역(聖役)이라는 이름하에 가족을 무찌르고 혹사시키면서 의무감으로 짓눌러 그들의 인성에 상처를 주고, 괴롭히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그리고 당연시 여기며 지금 것 살아 왔음을 크게 후회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아이들이 잘 커주고, 아내가 그만하게 버텨준 것이 고마울 뿐이다.

또 하나는 현장(現場)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늘 현장 중심의 삶을 주장하면서도, 사람을 아는 공부에 소홀히 하여 사람을 모른 채 ‘주의 종’이란 이름으로, ‘일하는 목사’로 일방(一方)으로 살았음을 후회한다. ‘사람을 모르는 목사의 목회’가 가능할까 싶지만 사실 그런 목사로 살았다.

주의 일을 위하여 세상의 삶을 무시하듯, 부대끼며 그렇게 사는 것이 성직자로서의 목사의 삶이라고 믿고(?) 살았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지도 못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고, 무식하고, 어리석게 산 것이다. 주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쌩땅을 파고, 맨 땅에 헤딩하는 일이 어찌 어리석음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절대적인 사명과 할 수 있는 일 사이에 구분이 모호했다는 사실을 후회한다. 한 교단의 총회장을 지낸 처지에 교정(敎政)을 하지 않았다거나 모른다고 하면 세인(世人)이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말씀과 주님 앞에서 진실해야 한다는 의식을 놓이지 않으려고 몸부림만 했을 뿐, 실로 교정을 교정답게 펼쳐보지 못했다. 늘 선(線)이 분명하지 못한 채로 교단을 세우고, 지키려는 과한 몸부림이 있었을 뿐, 목양(牧羊)에 목자로서 충실하지 못한 사실을 자인하고, 후회하며 회개한다. 그럼에도 아직도 그 언저리 한 구석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가장 후회가 깊은 것은 열심히 살았으나(?) 중요한 일과 급한 일을 구분하지 못한 채로 마냥 열심히만 산 것이 가장 큰 후회스러움이다. 급한 일은 언제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그 가슴의 허망함이란 거의 절망 가까운 것이었다.

목사(牧師)로서 30년 넘는 세월동안 나름 잔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주의 일(?)만 한다고 했으나 60을 넘긴 지금 무엇을 했는가를 돌이키니 그냥 어떤 일엔가 날마다 쫒기며 살았을 뿐, 무엇을 했는가가 하얗게,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진정 목사로 산 날들에 대하여 미안하고, 죄송스러울 뿐이니 어찌할 것인가. 급한 일과 중요한 일에 대한 구분을 분명히 하지 못한 삶의 결과라고 여긴다.

의왕중앙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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