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예레미야는 성전 밖에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향해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설교했다(렘 7:1-7). 예수께서는 성전 뜰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셔라”고 설교했다(요 7:37-44). 목마른 사람은 성소 안에 들어가 제사장이 베푸는 사죄와 축복을 받아야 하거늘, 성전 밖에서 “여호와의 전이라는 말을 믿지 말라”느니, 제사장이 아닌 “내게로 오라”니, 이거야말로 하나님의 성전을 조롱하고 제사장을 능멸하는 반체제 설교이다. 그러고 보면 성경에서 맹렬하게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던 위대한 설교는 대부분 성전 밖에서 이뤄졌다. 우리 시대 성공한 목회자들의 모습과는 일치점을 찾아보기 어려운 부분이다.

예레미야 시대는 온갖 부정한 일과 우상숭배가 극성을 부리면서도 성전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뤘다. 당연히 저들의 삶에는 정의가 없었다. 압제당하는 자들에 대한 관심이나 배려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성전은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었으니, 그런 곳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을 수밖에.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다. 종교적 위선과 성전 부패가 극에 달했다. 그럴 때 예수께서는 성전 밖에서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고 하신 것이다.

“낱알을 원한다면 당신은 그 껍질을 깨뜨려야 한다”(에크하르트): 바울은 낱알인 생명을 얻기 위해 유대교라는 낡은 껍질을 깨뜨렸다. 바울 당시 유대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바울은 달리 해석했다. 할례는 믿음에 대한 ‘증언’이지, 하나님의 자녀 됨의 ‘보증’이 아니라고(롬 4:1-12). 이에 대해 칼 바르트는 “그(아브라함)는 믿음의 모범을 보임으로서 그 자신은 명시적인 것(역사적인 것)으로부터 후퇴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어느 교회의 교인으로 편입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삶에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어떤가? 내 교회 교인 ‘만드는’ 데는 열심인데,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데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무수한 설교가 이뤄지기는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 수 없는 지도 모른다. 저 옛날 예레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께서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지금 성전 밖에서 말씀하시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교회들도 부패하고, 생명 없는 종교에 불과한 게 아닌지.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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