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태영 목사

밀물과 썰물이 교차할 때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것처럼, 시대의 격변기에는 곳곳에서 종말현상이 발호한다. 가치관의 혼란이 일어나고, 도덕이 붕괴하고, 인간성이 고갈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은 현세든 내세든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한다. 현세 가운데 내세가 있고, 내세 가운데 현세가 있다. 종말의 때가 오리라고 믿기는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들려주신 하나님 나라 비유는 오늘의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마 13:24-34). 사람이 어떤 일에 최선을 다했음에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실망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분노하고, 원망하고, 비관하고, 포기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그러지 말라고 하신다. 사람이 하는 일은 온전할 수가 없다. 선을 이루고자 하는 데도 결과는 악이 더 기승을 부릴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이기에 어려움이 더 많을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겸손하라고 한다.

잠언에서 겸손은 가난 혹은 가난한 자와 관련을 맺는다. 그리고 ‘가난한 자’를 말할 때는, 가난한 자가 존재하는 사회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가난한 자가 존재하는 ‘현실’을 말한다. 그리하여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는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부자에게 두지 않고 가난한 자에게 두는 걸 지혜로 말한다. 결국 그렇게 함으로써 “재물과 영광과 생명”(잠 22:4)을 보상받는다고 한다. 반전의 지혜이다. 멀리함으로써 결국은 되돌아오는 것, 그것이 참된 지혜이다.

잠언이 지혜를 말할 때의 특징이 있다. 항상 반대의 것을 나란히 놓는 대칭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의 선택을 말하기는 해도, 다른 하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부정하지 않고 선택하는 것, 그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라지 비유일 것이다. 악이 범람하는 세상일지라도 악을 부정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쓰지 않고 선을 실천하는 데 열심을 내라는 것이다. 비록 밭에 가라지가 자랄지라도 씨 뿌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것이다. 가라지를 뽑는 일로는 선을 이룰 수 없다. 선을 심어야 선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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