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이며, 나눔의 공동체이다. 그럼에도 오늘 한국교회 교인들은 목사와 교회를 동일시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한마디로 교회가 곧 목사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교인들이 교회에 발을 디디면서부터 시작된다. 입교교육을 비롯하여 초급성서교육, 중급반성서교육, 고급반성서교육, 제자교육, 셀 교육 등의 성장프로그램을 통해 교회를 이해시키고, 교육을 이수한 사람들에 의해 형성해 왔기 때문이다. 목회자들 역시 교인들에게 영성, 성령이란 이름으로 교육에 많은 수고를 했다.

그러나 일부 교인들은 교육과정에서 기대감보다 실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교회에 처음 출석하면서, 많은 기대감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즉 목회자로부터 우정 어린 격려, 생의 최고 경지에 이르는 동반, 인생의 위기에 개입해 위로를 받고, 직무장 그리고 인간으로서 딛을 만한 이웃, 확실한 미래를 열어주는 인물로 여겼다.

문제는 이러한 기대가 교회에 발을 딛는 순간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 나눔의 공동체가 아닌 목회자 중심의 이기적인 단체이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교회, 즉 목사는 결국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과 희망을 가지고 찾아온 교인들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리고, 말과 행동이 다른 목회자의 직무인 복음, 교인들의 귓전을 울리는 설교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하다.

교회를 목사에게 고정시킨 결과, 그로 인한 위험성은 극명해진다. 얼마나 교인들이 목회자와 갈등, 교인간의 갈등으로 인해 교회를 떠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그것은 면담과 교육을 통해 쌓은 목회자와의 신뢰, 교육을 통해 끈끈하게 맺어진 공동체성의 파괴 등의 부정적인 체험은 결국 교인들이 교회를 이탈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한마디로 초대교회의 사랑의 공동체, 나눔의 공동체, 섬김의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교인들이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교회를 떠났고, 목회자를 신뢰하지를 못하면서 교회를 떠났다. 나눔과 사람, 그리고 섬김의 공동체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분쟁은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 분쟁을 막기 위해 일부 중대형교회는 목회자 중심의 교회규칙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누구를 위한 종교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최근 교회규칙이 교회건물과 목회자 자신을 지키기 위한 규칙인 냥 자랑하는 목회자도 나타났다. 정기적으로 교회규칙 세미나도 열리고 있다. 세계적인 교회사가 ‘하르낙’은 기독교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교회의 본질을 상실하고, 세속화되어가는 교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평신도들이 모든 종류의 교회활동들을 결국에는 오직 목사들과 신학자들로부터만 기대하며, 교회와 아무런 관계도 맺을 필요가 없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평신도들의 교회적, 복음적 자유를 인식하는 교회”
이 비판은 분명 공동체성을 상실하고, 교회의 모든 활동을 목회자에게 고정시킨 결과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칼뱅이 주장했던 ‘모든 신도의 사제직’과 판이한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이기주의에 길들여진 한국교회는 성서에 담겨진 참진리 외치기보다도, 참담하고 쓰레기 같은 말로 교인의 숫자를 늘리기에 급급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교회의 강당은 ‘굿당’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고, 십자가는 지지를 않고 부자들을 위한 울음소리만 들리고 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교회는 성도들의 신앙공동체이며, 교제하는 곳이다. 그래서 신약성서는 성도들을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 말하고 있다. 교회는 결코 건물이 아니다.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교회 안의 회원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대해 자유롭게 응답하는 수단이 되어 하나의 행동이기 때문이 아닌가.

이제라도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건물에 높이 세워진 십자가를 내려, 자신의 등에 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골고다의 언덕,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 받는 이웃을 위한 교회로 변해야 한다. 이것만이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한국교회의 마지막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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