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성 택 목사
메르스가 한풀 꺽이고, 장마가 다가오면서 가뭄의 해갈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그 혼란의 여진이 남아있는 지금 여전히 우리 가운데 맴돌고 있는 망령같은 불안과 공허감을 달래는 일이 남아 있다. 여전히 경제는 불투명하고 거부권 정국으로 인한 정치권의 무능함이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을 주기 못하고 있다. 도대체 이 현실에서 무엇인가 해낼 수 있는 사람도 단체도 없어 보인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혼미한 사회적 불안을 잠재울 힘, 스스로 안돈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다. 누군가 있다고 주장할지 몰라도 끝없는 갈등과 분열, 불신과 정쟁의 삶에서 속고 속아온 삶의 현실에서 누구의 말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위기가 정말 위험한 것은 아무리 미약한 위험일지라도 그것을 해소할 능력이 없다는 데 있다.

대통령의 거부권이 몰고 오는 갈등을 보라. 거부권은 대통령의 권한이다. 속내에 담긴 그들의 정쟁을 내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거니와, 권한을 행사한 다툼이 이와 같다면 대통령의 권위도 더 이상 어떤 문제 해결의 힘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존경받는 지도자가 없고, 평판 있는 양심가가 없다. 그러나 교회가 있다. 그래서 교회가 희망이다.

지금 교회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졌고, 사회적 신망은 이미 잃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교회가 지금의 사회적 현상을 해소할 적임을 자임하는 것이 부담스러울지라도 그 결단이 필요하다. 일반적인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가? 그 가장 핵심은 사람의 마음과 그 영혼을 움직이는 일이다. 아무리 종교가 패역하고 무력하여져도 종교의 근본과 역할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가 힘겹게 나서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선 교회는 자신의 것을 먼저 사회에 내어 놓은 결단이 필요하다. 인력과 물질과 인프라와 경륜을 내어 놓아야 한다. 담을 헐고 백성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메르스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찾아가 도와야 한다. 작은 어린아이의 편지 하나에 눈물을 보이던 간호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갓 어린아이의 편지가 감동을 일으킨다면 한국 교회의 겸손한 섬김이 왜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겠는가?

지금 사회는 교회의 도움과 역할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자신감을 가지고 이 일에 발 벗고 나라를 위해 나서야 한다. 이 일은 가까이는 교회의 중흥를 도모하는 우리의 의지요, 더 멀리 보면 진정한 성경적 교회를 회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어느 시대든 교회의 역할은 소중한 것이지만 이 번 만큼은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사회도 서로 치료받고 치료하는 소중한 경험을 갖고, 교회도 그 위상과 권위를 회복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아직도 교회가 보이지 않는다. 현상을 질타하는 설교도 있고, 회개를 촉구하는 기도회도 있다. 그러나 행동하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다. 울고 있은 이 백성을 안고 있는 교회가 보이지 않는다. 높은 강대상에 내려오라. 혹시 깊은 기도처에 있는 이가 있다면 이제 나오라. 아픈 상처로, 불신과 불안으로, 고통과 신음으로 점점 더 분열과 대립과 갈등으로 몰고 가고 있는 이 나라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섣부른 이들이 발호하고 기회를 찾는 비겁한 이들이 이를 활용할 것이다. 그들을 막고 이 땅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이 역사하도록 모두가 나서야 한다. 어쩌면 이 위태한 정국이 한국 교회를 위해 주께서 주신 또 한 번의 기회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망설임은 불충이요, 외면은 무책임이다.

그리스도대학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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