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사울이 왕이 되었을 당시는 전쟁을 하나님의 통치행위로 받아들였다. 전쟁은 ‘시작’도 ‘끝’도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관련이 있다고 본 것이다. 때문에 전쟁에 임하는 왕이나 장수는 반듯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야 했다. 마침 블레셋이 막강한 병력을 앞세워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위급 상황에 처했을 때이다. 사울로서는 어떻게든 전세를 바꿔야만 했다. 전쟁 개시를 위해 하나님께 속히 제사를 드려야 했는데, 제사장 사무엘은 약속한 날 7일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조급해진 사울은 자신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된다. 기다렸다는 듯 뒤 늦게 나타난 사무엘은 사울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며 크게 책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울의 자식들은 왕으로 세우지 못한다는 선언까지 하는 게 아닌가.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터무니없는 일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사울은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된 것이다.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하는 장면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 있다. 온 세계 교회는 매 주일 예배 혹은 미사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예수께서 재판받으신 기록에 의하면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빌라도가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대목은 없다. 그런 빌라도가 마지막으로 한 일이 있다.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눅 23:23). 법이 아닌 다중의 소리가 이겼다는 것이다. 빌라도는 로마의 총독으로서 최고의 재판관이다. 재판관에게 신율이 있다면 법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그럼에도 빌라도는 군중의 환심을 사려 어리석은 일을 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는 예수를 죽인 책임이 없다며 물로 손을 씻기까지 한 것이다. 누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 권력의 어리석음, 난폭함, 무지함을 드러내고 있다.

죄악의 역사는 언제나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함으로써 비롯된다. 반면에 복음은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려는 의지를 꺾어 놓고 하나님의 정의에 순복하도록 한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이면 늑대처럼 사나운 야망의 사람들이 양처럼 순한 사람으로 변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전보다 더욱 강한 사람이 된다.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하기 때문이다. 나라의 지도자로서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권력의 야망을 접고 법의 정의를 세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문제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런 이들을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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