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자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고전 13:18). 바울은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립적으로 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약에서 말하는 지혜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편적인 지혜이다. 솔로몬의 지혜가 대표적인 예이다. 구약에서는 이 방편적인 지혜를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으로 믿었다. 솔로몬이 지혜를 얻기 위해 1천 번제를 드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세에 이르러서는 이 ‘솔로몬의 지혜’를 우주적 신비를 푸는 ‘열쇠’ 혹은 감춰진 비밀을 해독하는 ‘암호적 지식’으로 여겼다. 오늘날도 솔로몬의 지혜를 마치 우주적 신비를 푸는 ‘신통력’ 쯤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

신약 시대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헬라인들은 모든 존재의 근원을 밝힐 수 있는 능력을 지혜 혹은 지식으로 여겼다. 사람이 지식의 최고 단계에까지 오른다는 것은 신과 동일한 능력을 지진 존재가 됨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런 사상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보면 명백히 반신적이다. 사도 바울이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립적으로 본 이유이다. 인간이 반신적으로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자기 오류를 부정하고, 자기를 절대화하고, 자기를 우상화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 없다(막 10:15).” 어른들은 사물을 판단할 때 반복된 경험 즉 습관에 의존한다. 이런 습관적인 판단과 행동이 하나의 논리체계를 갖추고, 자기 확신을 지니게 되면 그것이 ‘세상의 지혜’가 된다. 어린 아이는 어떤가? 경험에 의해 판단하지 않고 ‘호기심’에 이끌린다. 어린 아이는 마치 아직 그림을 그리지 않은 화선지와 같다.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순수 그 자체이다. 어린 아이에게는 자기를 정형화시킨 ‘세상의 지혜’라는 게 없다. 그만큼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들일 여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열린 지혜이다. 어린 아이처럼 비권위적이고 비결정적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무한한 상상력과 추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나라의 지도자가 세상의 지혜로만 무장되어 있으면 그 나라는 그가 말하고 구상하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용인되지 않은 닫힌 세계가 된다. 꽉 막힌 답답한 세계가 되는 것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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