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종합 선교모델

대한민국은 광복 70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67년, 분단 70년, 개신교 선교 130년을 맞았다. 한국교회는 분단 70년, 광복 70년, 한국선교 130년을 맞아 여러 가지 굵직한 행사를 진행 중에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가난하고 천박한 백성들을 향한 영미 선교사들의 선교형태와 분단의 중심에서 한국교회의 역할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어떠한 평가도 내놓지를 못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개신교가 많은 시행착오를 일으킨 영미 선교사들의 20세기 ‘식민지 선교모델’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조선의 역사와 문화, 심성을 몰각한 영미의 선교행태를 그대로 펼쳐 가난한 백성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지 못했다.

한국개신교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지 못하고, ‘축복’과 ‘기복신앙’을 강조하며, 바벨과 맘몬을 노래했다. 철저하게 영미의 경건주의적 각성운동에 바탕을 둔 ‘식민지적 선교모델’을 실천해 왔다. 이것은 피압박 민족과 정치적으로 소외당하던 사회적 약자들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이제 19세기 아니 그 위로 한참 거슬러 올라가 15,16세기 유럽의 가톨릭교회들이 남미를 침략하면서, 벌인 선교모델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해야 할 때에 이르렀다. 이러한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개신교는, 과거 잘못된 ‘식민지선교모델’에 대한 평가 없이, 경건주의적 각성운동을 벌이기에 바빴다. 한국개신교가 계속해서 영미의 경건주의적 각성운동에 바탕을 둔 ‘식민지선교모델’을 펼친다면, 분명 이웃종교와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말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21세기 한국교회는 130년 전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와 펼쳤던 선교모델을 그대로 현장에 적용한 결과, 마이너스 성장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사실 한국개신교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약자들이 교회를 떠나면서, 전도자원이 고갈되기 시작했고, 교회마다 무리해서 맘몬교회당을 경쟁적으로 건축하고 있다. 이에 부담을 느낀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 휴면에 들어갔으며, 많은 교인들이 개신교를 이탈, 천주교 또는 불교로 옮겨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개신교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냐는 것이다. 광복 70년, 분단 70년, 선교 130년을 맞은 한국개신교가 냉철하게 평가하고, 선교방향을 수정해야 진일보 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한국개신교는 영미의 ‘식민지 종합선교모델’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한민족의 심성을 기독교정신에 담아내지를 못했다. 즉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 선교를 감당하지 못했다. 19세기 이전의 ‘식민지적 종합선교모델’은 19세기 중엽부터 어느 정도 달라졌다고 하지만, 식민지시대가 끝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19세기 중엽부터 영미계통의 교회 교인들에 의해서 전개된 선교활동 역시 식민주의적 선교모델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 영미의 개신교 선교는 경건주의적 각성운동에 중심을 두었고, 선교사들은 그대로 이식시켜 놓았다. 이와 함께 선교사들은 교파주의도 그대로 이식시켜 놓았다. 이것은 결국 분파주의로 이어졌고, 교단간의 분쟁을 초래했다. 한국개신교 분열의 단초가 된 것이다.

식민지선교종합모델과 교파주의로 선교의 영역을 넓힌 서구인들은 19세기를 ‘위대한 세기’로 평가했다. 대신 비서구인들은 ‘굴욕과 고통의 세기’였다. 당시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는 가난한 민중의 고통을 해결하는데 매우 인색했다. 대신 ‘조선인의 영혼구원’에 목표를 두고, 영적각성운동과 전도에 힘썼다.

 
경건주의적 각성운동

19세기 말 영미의 선교사들은, 조선인이 살고 있는 역사와 삶의 터전인 국가와 영토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는 것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05년 일제 강압에 의한 을사보호조약 체결과 1910년 일제에 의한 한일합방이라는 국가의 운명 속에서 선교사들은 선교사들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것이 1907년 ‘대부흥운동’이었다. 그리고 대각성운동 및 회개운동이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며 살았던 한민족이,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었기에 영적각성과 회개운동을 강조했느냐는 것이다.

대부흥운동은 일본의 식민지화에 직면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하던 ‘정치화된 그리스도인’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고, 교회를 정치운동으로부터 정화하는데 앞장섰던 것은 분명하다. 그것도 ‘정교분리’라는 명분을 내세워 한민족의 아픔에 대해서는 아랑곳 하지를 않고, 식민지세력을 직간접적으로 후원했다. 이 같은 선교사들의 형태는 아서 브라운 박사의 저서인 ‘극동의 지배’에 잘 나타나 있으며, 손규태 박사도 자신의 저서 <세계화의 기독교의 주 얼굴>에서지적하고 있다. 오히려 한국의 선교사들은 조선의 백성은 가난하고 더러운 백성으로 평가하며,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선진국인 일본의 식민지를 정당화 해주는 잘못을 저질렀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선교사들과 그 추종세력들의 교회내 교권 장악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한국개신교의 신학적, 신앙적 방향을 설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활동은 한국개신교회가 일본 국가주의에 굴복한 시기까지 장애 없이 지속되었다. 한마디로 선교사들은 조선 땅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오늘 한국개신교가 사회선교를 몰각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준 것이다.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활동했던 선교사들은 사회변혁적 사회의식, 사회선교를 위한 신학적 기초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를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식민지신학과 지배자의 신학으로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 해주며, 식민지 세력에 적극 협력했다. 광복 70년, 선교 130년을 맞은 한국개신교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주는 대목이다.

당시 선교사들은 자선적인 차원에서 학교를 비롯한 병원, 고아원 설립 등과 같은 비역동적인 사회의식을 가지고 활동했다. 이러한 자선적 사회선교활동은 한국사회의 개화와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20년대에 일어났던 사회주의운동은 한국개신교의 첫 번째 타도대상이었다. 그리고 서구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소개된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 계몽주의 신학, 자유주의 신학’은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격적이었다. 영적각성과 부흥, 그리고 축복을 강조하던 한국개신교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자선적인 차원에서 봉사활동

이렇게 영미의 경건주의적 각성운동에 바탕을 둔 복음만을 강조해온 한국개신교가 사회적 책임성과 정치적 봉사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때문에 한국개신교는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심성을 몰각한 나머지, 일본국가주의에 쉽게 굴복하는 범죄를 저질렀으며, 교회의 지도자들은 선교초기부터 지금까지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이권을 챙기고 있다.

오늘 곳곳에서 일어나는 교인들의 범죄는 타종교의 신도들에 비해서 유난이 눈에 많이 띠고, 목사들의 입에서는 참담하고, 쓰레기 같은 말들만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한국개신교의 성직자들의 범죄행위는 타종교에 비교해서 유난히 많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교인들은 의아해 하고 있다.

특히 신민지신학과 지배자의 신학을 그대로 받아들여 앵무새처럼 외쳐대는 목회자들은, 서구국가들이 잘사는 이유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강조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분명 서구의 국가들은 하나님의 축복 이전에, 중남미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침략, 이웃나라의 자원을 빼앗아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왜곡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웃나라의 침략을 정당화 해 주는데 한국개신교의 일부 목사들이 앞장서고 있다.

19세기 아프리카의 한 추장은 처음 선교사가 오면 영사가 들어오고, 마지막에 군대가 온다고 했다. 중국에서 활동했던 테일리 선교사도 “선교, 즉 복음의 선포는 식민주의자의 앞잡이다. 지원세력이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장기적으로 중국인의 해방을 위한 자극제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렇다고 이들의 선언이나, 행동이 하나의 새로운 선교모델을 만드는데 기여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식민지신학과 지배자의 신학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선교사와 교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한국개신교 역시도 민족과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를 가져다가 주었다.

행동하는 선교모델 제시해야

분명 서구의 제1세계 국가들은 이웃나라를 침략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것을 빼앗아 잘 살았다. 일본 역시 가난하고 힘없는 조선백성의 것을 빼앗아 부유함을 누렸다. 여기에 맛 들린 일본이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 일본의 끝없는 한국을 향한 폄훼 발언은 극에 달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일부 기독교 정치인들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천박한 말을 쏟아내고 있다.

더욱이 우스운 것은 이 같은 말을 해도 이들을 감싸기에 급급한 것이 한국교회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과거 한국개신교가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했던 친일인사들을 청산하지를 못하고, 그들을 그대로 끌어안고 한국개신교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실 한국개신교는 한일굴욕외교를 비롯한 각종 한일관계에서 침묵했다. 일본국가주의에 굴복하며, 하나님 앞에서 배교행위를 서슴지 않은 한국교회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스페인의 식민지 확장을 위한 탐험대의 군목으로 참여했던 라스 카사스 신부는, 군대를 앞세운 침략자들의 만행을 만천하에 밝혀 충격적이었다. 그는 볼리비아에서 식민주의자들에 의해서 처참하게 학살당하고, 수난당하는 원주민들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그때부터 스페인 가톨릭 식민주의자들에게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인디언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인디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을 자신이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선교적 과제로 생각했다.

라스 카사스 신부는 후기 스콜라주의 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사상에 기초해서 미 대륙에서 식민화의 법적 기초와 방법에 대한 이론을 수립하는 업적을 남겼다. 한마디로 원주민들도 다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적 대우를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스페인에서 통용되는 법에 따라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렇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교회의 선교모델이 이제부터라도 서구의 ‘식민지적 종합선교모델’에서 벗어나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향한 통전적인 새로운 사회선교의 모델을 제시함과 동시에 행동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야 할 현장에서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특히 광복 70년, 분단 70년, 한국선교 70년을 맞은 한국개신교는 민족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 분단극복이며, 평화적인 민족통일이다. 박순경 박사가 자신의 저서에서 밝혔듯이 세계교회가 세계분열의 중심에 있었던 지난 과거를 반성하고, 세계통일을 위해서 일했듯이, 분단의 중심에 있었던 한국교회가 분단극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