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당시 교황과 성직자들에 만연한 폐습을 지적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로마 가톨릭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고, 신구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누구나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498년 전이다.

당시 루터는 성서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였던 기독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신학적 ‘반항’(Protest)을 하게 되는데 후세는 이것을 우리는 종교개혁이라고 부르게 된다. 루터와 개혁자들이 시작한 종교개혁의 결과로 기독교 세계에 개신교라는 새로운 갈래가 등장하게 되었다.

독일에서 루터를 중심으로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면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리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이, 제네바에서는 깔뱅의 세속적 신앙운동이 꽃을 피웠다. 깔뱅의 제자였던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가서 개혁교회(Reformed Church) 신학을 전함으로써 스코틀랜드에 장로회 전통을 심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무수한 장로교의 뿌리는 바로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이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점차 가톨릭 교황청의 억압에서 벗어나면서 인문주의가 더 활발해지게 되었고 이것은 훗날 르네상스 시대로 개화했다. 철학이 신학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무조건적인 신앙의 강요는 호소력을 잃어갔다. 게다가 신대륙의 발견은 박해 받던 유럽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게 탈출의 기회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변화의 바람은 로마 가톨릭 내부에서도 일어났다. 구교는 조용히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과 더불어 내부 개혁을 통해 쇄신을 단행함으로써 신교에 맞설 명분을 더욱 공고히 했다. 로마 가톨릭이 변화를 모색하는 동안 개신교는 수백 개의 교파 교단으로 분열되었고, 그로 인해 개신교 교회들 사이의 갈등과 신앙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가톨릭 신부였던 마르틴 루터가 498년 전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톨릭 내부의 폐단과 부패상을 95개조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대자보에 써 붙일 때만 해도 ‘종교개혁’이라는 혁명적 과업을 이루겠다는 거창한 꿈을 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 루터는 자신이 훗날 이토록 대단한 신학적 반항아의 타이틀을 거머쥘 욕심보다 가톨릭 사제로서 눈앞의 부조리를 차마 외면할 수 없다는 절박한 양심의 소리에 그저 순응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어떤 의도와 목적에서 가톨릭에 매스를 가했든 그날의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혁명이 되었다. 그와 뜻을 같이 하는 개혁자들의 양심적 행동이 요원의 불길같이 일어나 유럽 전역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썩어빠진 구교를 신교로 바꾸었던 신앙적 결단과 개혁적 용단은 채 500년을 버티지 못했다.

작금의 한국교회의 상황은 1517년의 상황과는 많이 다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개혁을 빗대어 기독교를 비판하며 한국교회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한국교회 안에 이미 깊숙이 스며든 맘몬이즘과 종교적 권위주의, 분파 파벌주의는 500년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그런데도 교회를 개혁하고 갱신해야 하겠다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결단하는 행동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이대로 좋사오니”하며 망국의 길로 나아가는 한국교회를 그냥 지켜보는 일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것, 그것이 489년 전보다 더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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