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 될 수 없는 테러가 프랑스 파리의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테러는 반인륜적이며, 반문명적인 범죄행위이다. 이번 테러로 보다 나은 삶을 위해 IS를 피해 세계 곳곳을 유리방황하는 시리아 난민들의 삶은, 더욱 비참하지나 않을까 우려스럽다. 이미 일부국가에서 시리아 난민을 받지 않겠다고 국경을 봉쇄하기에 이르렀다. 국내의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단체들도 일제히 IS의 범죄행위인 테러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럽은 한 아이의 죽음을 계기로 국경을 난민들에게 활짝 열어줬었다. 터키 보드룸 해변에서 시리아 난민 에이란 쿠르디(3살)가 죽은 채 발견된 것. 쿠르디와 함께 보트를 타고 시리아를 떠난 쿠르디의 형을 비롯한 5명도 함께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다. 쿠르디의 주검은 세계인들의 공분을 일으켰으며, 서방국가들을 크게 움직였다. 독일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서유럽국가들이 국경을 열고, 시리아 난민들을 받아 들였다.

당시 유럽의 언론들은 일제히 머리기사로 ‘난민위기의 진정한 비극을 보여준다’(탤레 그레프), ‘난민의 참상이 얼마나 끔찍한지 통절히 느낀다’(가디언), ‘파도에 실려온 시리아 꼬마의 사진이 난민에 대한 유럽의 태도를 바꾸지 못한다면, 대체 무엇이 바뀌겠는가’(인더 팬던트), ‘유럽의 익사’(엘문도 등), 영국총리를 겨냥해 ‘데이비드 뭐라도 좀 하세요’(허핑턴포스트) 등등의 보도는 서방국가들의 난민들에 대한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탈리아 일간지 <라레푸블리카>는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면서 ‘전세계의 침묵에 대한 사진’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세계인들은 서방국가의 이 같은 태도에 대해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훈훈한 소식은 얼마가지 않았다. 이번 프랑스 파리의 연쇄 테러사건으로 인해 급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방향으로 급선회했다. 한마디로 참담하고 슬프다.

왜 이런 사건들이 한국교회가 우상처럼 여기는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테러로부터 안전한가(?) 한번쯤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또한 심히 걱정스럽다. 특히 서양의 문화, 제국주의적인 기독교를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교회, 이웃 고등종교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는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언제 IS의 테러가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 와 있다.

테러 분자 색출과정에서 붙잡힌 사람들 중에, 소지품에서 대구지하철 교통카드가 나와 한국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이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2년 동안 노동자로 일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에서 십자군을 조직해 테러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한국에서 종교전쟁을 하자는 것으로 해석된다.

IS의 테러사건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섬뜩하다. 문제는 파리 테러사건 이후 국경을 봉쇄하는 서방국가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현재, 시리아 난민들의 운명은 한마디로 처참하다. 그들의 유리방황, 떠돌이의 삶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식량이 충분한 것도 아니고, 구명장비 등도 제대로 갖추지를 못했다.

지중해를 유리방황하는 떠돌이들 중 상당수는 기독교인이다. 이들 기독교인 중 상당수는 지중해를 떠돌다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처지에 있는 떠돌이들로부터 살해당하고 있다. 한마디로 목숨이 붙어 있는 채로 바다에 수장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하나님의 피조물들은 힘 있는 자들에 의해서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갈수 있는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이슬람교도라는 이유로 서방국가들이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형제들의 잔인한 범죄 때문이다. IS의 잔인한 범죄가 계속되는 한 이슬람교도들의 설자리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그것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사원을 향한 테러, 이슬람교들에 대한 경멸 등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일부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이웃고등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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