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얼마전 터키 보드롬 해변에서 시리아 난민 에이란 쿠르디(3살)가 주검으로 발견됐다. 세계 언론들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쿠르디에게 집중됐다. 이 아이는 누구이며,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분명 쿠르디 역시 우리의 이웃이다.

쿠르디의 참담한 모습은 언론을 통해 유럽사회에 알려졌다. 지중해의 떠돌이들을 거부하던 서방국가들이 조금씩 문을 열기 시작했다. 시리아 난민들도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한 어린의 죽음은 이웃을 외면한 유럽사회를 깨우치는 계기를 가져다가 주었다. 당시 언론들은 보다 나은 삶을 찾아서 떠나는 시리아 난민들에 대해서 매우 냉소적이며, 이기적인 유럽인을 맹렬히 비난했다.

언론들은 일제히 머리기사로 ‘난민위기의 진정한 비극을 보여준다’(탤레 그레프), ‘난민의 참상이 얼마나 끔찍한지 통절히 느낀다’(가디언), “파도에 실려온 시리아 꼬마의 사진이 난민에 대한 유럽의 태도를 바꾸지 못한다면, 대체 무엇이 바뀌겠는가‘(인더 팬던트), ’유럽의 익사‘(엘문도 등), 영국총리를 겨냥해 ’데이비드 무라도 무엇 좀 하세요(허핑턴포스트) 등등을 보도했다.

난민들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온 서방국가들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탈리아 일간지 <라레푸블리카>가 쿠르디의 참담한 모습을 트위터에 ‘전 세계의 침묵에 대한 사진’이라는 제목으로 올렸다.

빨간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의 쿠르디 시신은 엎드린 채 얼굴을 모래에 묻는 상태였다. 밀려오는 파도는 쉬지 않고, 그의 시신을 적셨다. 세계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그의 모습은 인도주의적 해시태그와 세계 모든 사람들로부터 공분을 일으켰다. 이들 또한 우리의 이웃이며,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함께 살아야 할 이웃이다.

국제이주기구는 올 들어 지난달 말까지 지중해를 건너 유럽에 유입된 난민을 35만으로 집계했다. 쿠르디의 참담한 모습이 언론에 비쳐지기 이전까지만 해도, 이들에 대한 태도는 한마디로 냉담했다. 그러나 3살 어린이 쿠르디의 참담한 모습은 독일을 비롯한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등 서유럽국가들의 국경을 열게 했다.

독일은 올해 80만명의 난민을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것은 지난해보다 4배 늘어난 규모이다. 그러나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13조원원의 추가예산이 필요하다. 그리고 극우성향의 국민들과 충돌도 우려되고 있는 상황이다. 영국도 항공기로 난민들을 영국으로 직접 실어 나르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미국 역시 시리아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매우 전향적인 모습이었다.

시리아의 한 소년은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도 고향을 떠나 유럽으로 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다만 전쟁만 멈춰 달라. 시리아 사람들을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이 소녀의 말과 같이 누가 고향을 떠나, 아니 조국을 떠나 타국 만리로 피난가고 싶어 하겠는가(?) 진정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세계의 모든 민족은 알고 있다.

이러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유럽 국가들의 태도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바뀌었다. 더 이상 우리의 이웃인 난민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난민들이 들어오지를 못하도록 철조망을 치고, 경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제2의 쿠르디가 언제 어디에서 나올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중해를 떠도는 난민들 역시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를 향해 떠도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함께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것은 떠돌이도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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