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이 터득한 진리 역시 그러하다. 그는 본시 기득권자로서 예루살렘 중심의 사고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자신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 앞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던 사람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순수성과 열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전의 바울에게서 메시아는 영광과 권위의 최고 정점이었다. 십자가에 달리는 메시아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던 바울에게 고난받는 메시아는 혁명 그 자체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뒤집어진 것이다.
신앙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내면을 본다. 신앙 안에서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다. 그리하여 바울은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육체”로 부르지 않았다고 단호하게 말한다(고전 1:26-31). 육체가 무엇이겠는가? 신분, 사회적 지위, 용모, 영리함, 자기중심적 사고 등 가시적인 것들이다. 역설적인 진리이다. 만일 이 진리가 단지 관념적인 것이었다면, 정신 수양의 교훈은 될 수 있을지언정,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는 이들을 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심각한 불신의 대상이 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생명의 복음을 성공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복음의 불가시성보다 가시성에 더 매달렸다는 말이 다. 복음을 위해 일한다는 사람들의 자기 자랑과 탐욕은 세속의 범부를 뺨칠 정도이다. 자기 육체를 자랑하는 수단으로 복음을 선전하고 있으니 어떻게 역설적인 복음의 기운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겠는가. 복음의 적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 탐욕과 자기 자랑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으면 복음은 빛을 잃게 된다.
삼일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