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마태복음 25장에는 예수님께서, 내가 주렸을 때, 내가 목말랐을 때,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내가 벗었을 때, 내가 옥에 갇혔을 때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 자신이 가난한 자, 눌린 자, 멸시받는 자, 병든 자와 함께 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여기에는 도덕적인 조건이나, 종교적인 조건이 들지 아니한다. 예수는 어느 때, 어느 경우에나 항상 병든 자, 가난한 자, 눌린 자, 억울한 자였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분명 예수는 부자나, 권력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편에 서서 일한 적도 없다. 하나님은 항상 가난한 자, 눌린 자, 병든 자, 고난당하는 떠돌이들의 하나님이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가난한 자, 눌린 자,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그런 분이었다.

예수님은 일찍이 가난한 자, 눌린 자,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가난한 자들에게 내일 먹을 것을 주리라고, 또 눌린 자들에게 불의한 자를, 그 눌린 자가 용서 할 테니 눌린 자의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주시리라는 기도이다.

그것을 항상 먹을 것이 풍부한 부자가 이런 기도를 흉내 내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라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누르는 자가 가난한 이웃을 누르고 서서 “우리의 죄를 용서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종교의식은 하나의 허위이며,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탄의 계절에 조용히 묵상해 본다.

분명히 예수님은 가난과 질병, 그리고 권력자에 의해서 고난당하는 사람,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떠도는 떠돌이들에게 평화를 주고, 또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주기 위해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생전에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예수님도 결국은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셨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당시 유대민족이 죽음을 각오하고 정치적 독립운동에 나선 제롯당의 구호였다.

십자가 처형은 로마제국의 질서에서 정치범들이 받게 되는 형벌이다. 제롯당은 죽음을 각오하고, 해방운동에 나선 몸이라고 해서 ‘십자가를 진다’는 구호를 갖게 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외쳤던 것이다. 예수님도 결국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현대 신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정치적 참여를 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예수님도 정치법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어찌 보면 바울이 말한 “권력도 위로부터 왔으니, 무조건 복종하라”는 말과 대치되는 말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가난하고 눌린 자의 편에 계셨다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제자의 집단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보아 유대 땅의 가난한 사람들인 ‘암하레쯔’ 곧 서민대중에 속한 자들이었다. 당시 암하레쯔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가난하고, 멸시받는 대중이었다. 오르지 메시야의 왕국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이것만이 이들에게 희망이었다.

12월 25일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 땅의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 전쟁과 기아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떠돌이, 정치적으로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 사람구실을 하지 못하는 병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고 이들 곳에서 역사하셨다. 이들에게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주셨다. 또 평화를 선포하셨다. 2015년 성탄절만큼이라도 교회마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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