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총선이 다가오면서, 기독교의 정치세력화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기독자유당을 비롯한 기독교 정당이 창당대회를 갖는 등 기독교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움직임이 활발해 지고 있다. 문제는 기독교의 정치세력화가 일본제국주의의 잔재이며, 한국선교사들이 국제적 불의를 모면하기 위해서 내세운 정교분리정책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달려 있다. 한마디로 정교분리의 원칙이 보수적인 한국교회 교인들의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일본의 한국 지배세력이 노골화되면서, 기독교 선교는 정교분리정책을 제창했다. 이는 곧 국제적 불의에 대한 책임을 모면할 길이 열리고, 한국의 영미 선교사들은 여기에 협력하며, 권력의 중심에서 온갖 혜택을 누렸다. 겉으로는 정교분리를 내세우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정치권력에 깊숙이 개입했다. 이 때문에 많은 지식인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떠나 독자적인 항일독립투쟁에 가담했다.

정교분리정책은 이토의 식민정책과 완전히 합일했다. 1901년 장로교공의회에 속한 선교사들은 교회와 국가의 상호불간섭이라는 취지문을 전국에 배포했다. 이들 선교사는 정교분리만이 한국기독교를 일본의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이었다고 변호했다.

선교사 모펫은 정교분리가 소박한 복음의 영적 진리를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펫이 말한 것과 같이 당시 복음이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문화가 결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완전히 은폐되었다. 이는 곧 조선의 백성이 갈망하던 독립정신을 희소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조선의 독립을 갈망하던 기독교 지식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정치와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해방이후 계속된 기독교의 정치세력화의 움직임에도, 정치세력화의 갈망을 이루지 못한 이유도, 정교분리의 원칙이 교인들의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매우 정치적인 행보를 보여 왔다.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했던 보수적인 선교사들은 한민족이 갈망하던 민족의식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회개를 강조하며, 개인구원에 중점을 두었다. 결국 이것은 오늘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정통보수신학이 되었으며, 한국교회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이웃들을 외면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때문에 오늘도 목회자들의 입에서 ‘바벨’과 ‘맘몬’을 외치는 싸구려 복음을 뿌리내리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박순경 박사는 자신의 저서 <민족통일과 기독교>에서,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원칙’은 ‘복음의 영적진리’란 이름 아래 일본의 식민화 독점권을 허용하고, 한국교회의 치명적인 반민족적인, 반성서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사실 감리교 선교사인 존즈와 스크랜톤, 그리고 헤리스와 게일 등은 정치적인 사건을 떠나 한민족의 도덕적, 영적인 고양에 전념하는 것을 행동지침으로 삼았다. 한마디로 이것은 역사적으로 피압박민족의 추상적 책임회피였다. 그리고 이들 선교사들은 1905년과 1907년 원산과 평양에서 대부흥회를 열어, 가난하고 천박한 한민족에게 회개와 기복적인 구원만을 강조했다. 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한마디로 민족의 위기로부터의 도피처를, 민족적 위기와 상관없는 정신적 위로에서 찾았다.

이 같은 정교분리원칙은 해방이후 정치현장에 그대로 적용됐다. 영미선교사들의 상업자본주의에 찌든 싸구려 복음을 받아들인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복음영적진리 만을 강조하며, 정치적으로 고난당하는 이웃과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이웃을 위한 교회로 발전시키지를 못했다. 오늘 한국교회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때늦은 기독교의 정치세력화의 길이 멀고 험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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