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누가복음 15장 1-7절에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악하고 추한 사람, 병들고 못난 사람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 아닌가 싶다. 또한 이것은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오늘 산업사회에서 공통적인 것은 그 사회에 가치 있고, 유용한 사람이 아니면 낙오되고 버림받는다. 그것은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는 복잡한 오늘의 문명 속에서 불가피한 일이다. 인간의 능력을 존중하다 보면 인간 존재의 소중함을 잊게 된다.

모든 사람이 능력과 소유를 추구하게 되면, 인간은 주체성을 상실한다. 주체성이 없는 삶은 진실이 없다. 진실이 없으면 기쁨도 없다. 분명한 것은 인간을 능력과 소유에 따라 평가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소유이지 인간 자신이 아니다.

인간의 진정한 주체성은 아가페 사랑에 의해서 형성된다. 조건 없는 사랑 속에서만 인간은 자유롭다. 사랑이야말로 삶을 삶답게 한다. 사랑만이 삶에 기쁨과 보람을 준다. 사랑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다. 그렇다 조건을 내건 사랑은 인간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지 않고, 오히려 환멸을 주고 갈증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사랑은 인간을 해방하는 게 아니라, 인간을 예속시킨다.

조건적인 사랑은 고인 물처럼 썩게 만든다. 고인물이 더럽기 때문에 인간을 병들게 하고 갈증을 더하게 한다. 즉 타산적인 사랑은 인간의 삶을 빈곤하게 만들어 버리고, 타산적인 사랑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썩고 만다.
그러나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주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는 사랑은 나와 너와 그의 가슴을 통해서 흐르고 흘러 모든 인간을 자유와 평등의 바다로 인도한다. 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예수님의 교훈인가(?)

성서에는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여 그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었다. 이 광경을 본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비난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의 비유를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당시 유대 나라의 의회 역할을 하는 산헤드린의 주도권을 장악한 다수파였다. 그리고 이들은 율법과 종교의식을 엄격히 지킬 것을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이었다. 서기관은 율법학자를 말한다.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은 유대나라의 사회, 종교, 세제를 옹호하는 보수적인 무리였다.

반면 예수님이 사람들은 사회체제로부터 배척당하는 소외된 무리들이었다. 로마의 경제적 수탈의 앞잡이로서 민족적 지탄을 받던 세리들도 비참한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다. 높은 직위에 있는 세리를 제외하면, 많은 세리들이 경제적으로 빈곤했다. 세리들은 로마제국의 앞잡이로서 동포들로부터 세금을 걷어 들였기 때문에 온 국민의 혐오와 증오를 받아야 하는 딱한 무리였다.

예수님은 가난한 농민, 어부, 날품팔이, 병든자, 떠돌이 등을 중심으로 하나님나라운동을 펼쳤다. 여기에는 불구자, 창녀, 힘없는 어린이들도 있었다. 아무리 위선라고 해도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병든자들의 병을 고쳐주는 예수님을 비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는 달랐다. 사리새파와 서기관들은 이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비난했다.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복잡한 정결예법을 지킬 만큼 여유롭지를 못했다. 의욕도 없었다. 그리고 하루를 벌어 하룰 사는 사람들에게는 안식일법도 지킬 수 없었다. 아무튼 가난한 사람들은 바리새파와 서기관들의 눈으로 보아 멸망 받아야 할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이들을 혹독하게 비판하신 것이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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