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나라들이 즐겨 사용하는 슬로건이다. 역시 행복이 보장된 삶에 대한 은유로 폭넓게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요즘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지향하는 교회들이 있다. 주로 대형 교회들이 벌이는 완벽한 종교 서비스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서비스가 제공되는 교회에 다니는 이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의 주기에 따라 일어나는 모든 일을 교회에 맡기면 된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교회이다. 실제로 모든 장례 절차와 비용과 묘지까지 완벽하게 책임지기는 대형교회도 있다고 한다. 그들의 일사 분란한 장례 서비스에 절로 감탄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믿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답은 달라진다.

성서가 증언하는 믿음이 참으로 내 안에 들어왔다면 나를 고뇌하게 하고, 갈등하게 하고, 상처를 입히는 게 맞다. 믿음이 내 욕망에 박수를 쳐주고, 옹졸함과 편견과 뻔뻔함을 무조건 옹호한다면 그게 제대로 된 믿음은 아닐 것이다. 온전한 믿음은 불가피 세상과 갈등할 수밖에 없다. 불의에 저항하고, 탐욕을 질책하고, 억울한 이들을 옹호하고, 슬퍼하는 이들과 연대하고(특히 연대가 문제이다), 분쟁을 먹이로 삼는 이들 가운데서 평화 공존을 말하는데 세상이 좋아할 까닭이 없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지향하는 교회가 그런 믿음을 지닌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믿음은 정체된 세계에 도전함으로써 필시 갈등하게하고 스스로 상처를 입는다. 예컨대 랍비 출신 철학자 야곱 타우베스에 의하면, 바울 당시의 세계는 두 가지 모델밖에 없었다. 로마제국의 질서 그리고 율법과 혈연에 근거한 선민 이스라엘이다. 바울은 복음으로 이 두 질서에 정면 도전했다. 새로운 세계를 다스릴 메시아를 말함으로써 로마가 가진 세계 제국으로서의 힘을 약화시키는 한편, 율법과 선민의식에 터한 이스라엘 민족을 상대화시켰다. 말할 것도 없이, 바울은 두 세계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어 극심한 배척과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제3의 질서 곧 복음에 기초한 교회는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불의한 세계에서 문제의식도, 추구하는 세계관도, 비전도 없이 완벽한 종교서비스를 자랑하는 교회의 믿음이라면 이미 죽은 믿음일 것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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