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 배추흰나비 날고
앞산 나무들 한참
눈물 나게 푸르고 싱그럽구나.

방금 숲에서 튀어나와 이웃 숲에 날아가 박히는
저 새는 이름이 뭘까?
뭔가 앞에 많았던 것이 훌쩍 사라진 듯
가슴 한가운데가 휑하다.

창을 열고 바깥공기 흠씬 들이켜도
채워지지 않는 휑한 느낌
조막남한 새 하나 사라진 때문은 아니다.
내 앞을 날아간 새가 어디 한둘인가.

예전에 날아간 새들의 자취
잊고 살았던 희미한 뒷모습들까지
조막만한 새를 따라가면서
내가 그만 텅 빈 새장이 되었으리라.

그 사이 나비는 멀리가고
나는 새장에 갇힌다.

▲ 정 재 영 장로
배추흰나비나 새가 지시하려는 비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다만 그것은 ‘날고’, ‘날아가고’, ‘사라진’ ‘희미한 뒷모습’ ‘자취’라는 말에서 과거에 대한 사유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 발화의 동기는 3연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삶의 과정에 많이 겪었던 동일한 사건의 기억들에서 연유하고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는 있다. 그래도 딱히 어떤 구체적인 사건을 밝히지 않아 포괄적이고 함축적인 언어다.

첫 연은 상황적 처지를 말하는 자연환경이다. 주위 환경이 회상을 만들어 주는 동기다. 즉 싱그런 말에 싱그러운 날의 회상이다.

그런 정서 속에서 감각하는 배추흰나비나 조막막한 새의 이동은 다른 숲으로 부모의 품을 떠난 자녀들에 대한 애정일 수도 있고, 삶속에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과의 별리(別離)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 대입해도 항상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따뜻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감각할 수 있다.

내용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작품의 미학적 수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점은 수사학적 반전에서 찾을 수가 있다. 즉 날아 간 새가 있던 그 새장에, 휑한 마음의 화자가 갇히고 마는 역설적 위치를 설정함에서, 떠남과 머무름의 이질적 요소가 컨시트(conceit)를 생성한다는 융합시론을 확인해주는 작품이다. 새장 노릇을 해주었던 새들의 새장이었던 화자가 다시 그 새장에 갇히는 반전(아이러니)이나 역설적 논리의 모순이 바로 컨시트의 요점이다.

새들이 날아간 후 새장이었던 화자의 자리에, 화자가 다시 갇히고 마는 곳이다. 곧 삶이 우주가 되며 또한 시인이 존재하는 모든 우주가 그의 새장인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모순 같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한 진리다. 이처럼 시는 삶을 깊게 성찰한 사유의 결과물이며, 흔적이다.

한국기독교시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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