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 인 찬 목사
반면에 예수만이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좁은 문에는 발길이 뜸해지고, 나중에는 길이 점점 좁아져서 홀로 걷기도 어려운 험로가 될 개연성이 높다.

참 어려운 시대가 이미 우리 앞에 왔다.

이런 형편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좁은 문을 선택했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가는 그 길을 버리고, 예수님만을 나의 구주로 모시는 좁은 문을 선택하고, 좁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는 확실한 사상과 특별한 은혜의 사람이든지, 세상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돌아이(또라이) 일 것이나 사실 이보다 더 큰 복이 없고, 기적이 없다. 진정 감사(感謝)다.

내가 믿고 싶다고 믿을 수 있는 일인가? 내 의지로 믿어지는 일이던가? 내 눈으로 무엇을 보았기에 선택한 것인가? 아니지 않은가. 은혜로 믿은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믿게 만드셨다.

믿어짐이 희한하지 않은가? 그러나 벌써 믿고 믿어지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 이외의 것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진정 하나님의 은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이 놀라운 구원을 선물로 값없이 받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는 좁은 길을 선택했다.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할 이유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다. 좁은 길을 들어섰다고 해서 모두가 좁은 길을 가는가라는 것이다. 좁은 문을 들어선 사람이 좁은 길을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문제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로 고민한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을 받은 대상은 제자들이다. 산상수훈이 불신앙인 들에게 주시는 주의 말씀이 아니지 않은가. 예수를 믿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가정도 버리고, 고향도 떠나서 혈혈단신으로 주님을 좇는 주의 제자들을 상대로 하신 말씀이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예수의 사람, 믿음의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주이심을 고백하고, 주님 앞에 자기를 던진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다. 그러면 이것은 단순히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 그 이상의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예수 믿는 것도 좁은 길이겠지만 오히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험하고, 고되고, 외로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이 좁은 사명의 길을 끝까지 믿음으로 가라는 말씀이다.

'좁은 문 들어서기'와 '좁은 길 걸어가기'는 원칙상 하나이어야 한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서기는 했지만,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그 길을 넓히고 다듬어 적당히 쉽고, 편하게 가려고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좁은 문 들어가기'와 '좁은 길 걸어가기'를 별개의 것으로 신앙생활하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예수 믿기'와 '예수 좇아가기'가 일치하지 못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신앙고백이 곧 신앙생활이 당연한데 신앙고백과 신앙생활의 따로따로가 자연스럽다.

좁은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당연히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온갖 이유와 핑계로 넓은 길을 기웃거리면서 적당히, 무늬로 좁은 길을 흉내 낸다. 이는 바른 신앙생활이 아니다.

사명자로서 좁은 길을 걷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인가?

살면서 신앙생활이 정말 어렵다고 생각될 때가 많은가?

믿으면 믿을수록 신앙생활 바로 하는 것이 얼마나 피나는 삶을 요하는 것이라고 자주 느끼는가? 목사로 사는 것이 고단하고, 사명자로 살기 위해 자기와 피나게 싸우고 있다면, 적어도 좁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가끔이지만 예수 믿는 것이 너무 좋고,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다. 어린이처럼 신앙생활이 좋고, 행복한 사람이 있다. 이것도 정상이다. 예수 믿으면 기쁘다. 예수 믿으면 행복하다.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것만큼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이 또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이렇게 마냥 좋고, 기뻐하는 것만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린신앙이거나 철부지 사명자일 수 있다.

의왕중앙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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