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예수와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힐난할 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막2:19-20)고. 혼인예식은 하늘과 땅이 상합(응)하는 의례이다. 기운이 승할 때이다. 먹고 마시며 기뻐해야 할 때이다.

주님은 우리를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오신 신랑이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는 동안은 혼인 예식을 올리는 때이다. 생명의 기운이 승하는 때요, 새로운 변혁이 일어나는 때이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을 수 없”는 것처럼 기운이 솟구치는 구원의 때는 낡은 제도나 관습의 틀로는 감당할 수 없다. 그러함에도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낡은 부대로 예수를 담으려 했다. 저들의 구태의연함과 리골리즘(엄격주의)의 허상을 간파한 사람이 바울이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고후 3:17-18)다는 말은 그런 배경에서 나온 말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자유하는 영을 부어주신다. 복음은 솟구치는 생명으로 모든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한다. 또한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얼굴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 동시에 미래를 향해서 자신을 개방하게 한다. 바울은 복음의 미래를 내다보며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을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라고 말한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얼굴을 가리게 하지만,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개방한 사람은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체면이나 위선 따위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남을 속이려 하지 않기에 말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이 아닌 삶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진리로 자신을 증거한다. 그리하여 복음은 자신을 끊임없이 위장하는 초자아(super ego)의 가면을 벗어 던지게 한다. 복음 안에서는 참된 자아가 드러난다.

복음이 하늘 씨앗이라면 우리는 땅이다. 땅인 내가 하늘 씨앗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하늘을 품고 사는 사람이 된다. 복음 안에 있는 나는 땅의 것에 매이거나, 비관하거나, 부러워하지 않는다. 반대로 죽음의 신 바알은 생명의 진액을 소진시킨다. 그 추한 몰골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게 된다. 그것도 화려한 가면 말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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