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성관 목사
한국교회가 부흥을 고민하지 않을 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30년 한국교회가 오늘날처럼 부흥 딜레마에 빠진 적도 없었습니다. 1980년대 한국교회 성도가 무너졌습니다. 1990년대 한국교회 목회자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무너지던 한국교회를 지탱한 것은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 목회철학이었습니다. 1990년대 허물어지던 목회자들을 그나마 세운 것은 성령운동이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혼란과 타락 앞에 한국교회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 해결책으로 ‘다시 연합하자’ ‘회개하자’ ‘선교하자’ ‘기도하자’고 외칩니다. 그런 많은 논의 가운데 지금까지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두 가지 방안으로 정리됩니다. 하나는 값싼 은혜, 흔한 복음, 싸구려 칭의로 성도가 성도답지 못했다는 자성입니다. 회개해서 세상의 빛이 되자! 소금이 되자! 외칩니다.

두 번째는 교회가 교회다울 때 한국교회 부흥은 다시 온다고 믿습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라!?” “예배를 예배 되게 하라!?” 하지만 무엇이 교회를 교회답게 하느냐? 하는 각론에 들어가면 또 다시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방법론에 지쳐 있습니다. 고구마전도, 호떡전도, 파라솔전도 등등으로 전도하자고 합니다. 기도하자고 합니다. 선교하자고 합니다. 경배와 찬양하자고 합니다. 빛과 소금이 되자고 합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는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본질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성전 앞 앉은뱅이가 요구하는 것은 돈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줄 수 있는 것은 돈이 아니라, 예수였습니다.

‘나는 가진 돈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예수가 있다. 그 예수가 너를 일으키신다.’

그리고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켰고, 그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생명이 일어났습니다. 죽었던 다리에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소망 없던 인생이 예수 이름으로 새 출발하게 됐습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만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수많은 앉은뱅이를 모은다고 해서 부흥은 아닙니다. 진정한 부흥은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납니다.

부흥은 수많은 시체를 한 곳으로 안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부흥은 죽은 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잃어버린 구원의 이름 예수, 그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그 곳에서만 참된 구원이 일어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 많은 돈을 들여서 수많은 앉은뱅이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앉은뱅이들을 돌볼 사람들을 키웁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교회는 그 본질에서 점점 멀어지고, 진정한 부흥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18세기 영국의 대부흥은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시작됐습니다. 요한 웨슬리와 그 동생 찰스 웨슬리 형제가 Holy Club이라는 작은 성경공부 모임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 모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기를 소망했습니다. 드디어! 그 젊은이들에게 성령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주변에다,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부흥은 그렇게 시작되고 또 그렇게 전파했습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은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서 일어났습니다. 집회 마지막 날, 한국교회 지도자 길선주 장로는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저는 아간 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때문에 축복하실 수 없습니다. 나는 1년 전 내 친구가 임종하면서 맡긴 재산을 관리하면서 그 미망인의 돈 100불을 가로챘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가로막았습니다.”

그 순간! 장애물이 걷혀졌습니다. 바로 그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시작했습니다. 곧이어 그 죄의 자각이 모든 신자들을 휩쓸었습니다. 그날 저녁 예배는 새벽 2시가 되어도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수십 명이 울면서 그들의 죄를 고백할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것은 마치 지옥의 뚜껑을 열어놓은 것 같았습니다. 이 집회를 기점으로 대한조선에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회개가 부흥의 시작인가? 아니다. 놀랍게도 회개보다 앞선 것이 하나 있었다. 저는 오늘 이것을 전하고자 한다.

1900년대 당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열심히 특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 위에 불어 닥친 부흥의 물결은 성경공부에 있었습니다. 교인이라면 누구든지 성경을 배웠습니다. 한 해에 1400여 회의 사경회가 열렸고, 9만 명의 학생들이 참여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가정예배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출교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성경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사업 차 여러 곳으로 다녀야 했던 교인들도 성경을 들고 다녔습니다. 한국의 목사, 전도사, 집사들은 일본사람들에 의해 억울하게 감옥에 가게 되면 그들은 불평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고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여러 번 성경을 통독하고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교사, 설교자들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부흥에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하나님 나라의 부흥, 그 부흥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지면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한국교회는 그 부흥의 씨가 뿌려지지 않습니다.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그 생명의 씨가 뿌려지지 않습니다. 여기 이 강대상은 있는데, 강의만 있습니다. 설교는 하는데, 계시는 없습니다. 도덕 강론은 하는데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조금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흥은 이 예배당에서! 이 강단에서! 복음이, 그 생명이, 그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져야 합니다.

여기서, 이 예배당에서 예수의 이름만이 높아져야 합니다. 예수! 그 이름으로 만져지고, 성경! 그 계시만을 붙들고 일어서야 합니다.

구약성경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부흥이 있습니다. 하박국 3장에서 선지자 하박국은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 부흥케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주여, 지금 주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 그 일을 계속하고 또 계속 하십시오.”

부흥은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부흥은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박국 당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악한 갈대아 사람들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처참하게 부수고, 심판하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하나님, 그렇게 일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렸다.

“어떻게 이렇게 일하십니까?” 따졌다.

대신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여, 저렇게 하시고, 이렇게 하십시오.’라고 요구합니다.

그렇게 하박국은 망루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갈대아 사람들을 일으켜서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것은 나의 경고이다. 나는 이 심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 여호와는 갈대아 사람들을 일으켜서 내 백성을 괴롭게 하는 심판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 백성들이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만 살아야 한다.

나 여호와는 나의 거룩한 성전에 있다. 그러므로 오 세상은 내 앞에서 잠잠해라.”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서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방법이, 하나님의 심판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 부흥케 하소서’

즉 ‘주님, 지금 하시는 심판을 계속하십시오. 다 부수세요.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부흥시킬 방법은, 그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흥은,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심판이든지 아니면 구원이든지 간에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일하시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부흥입니다.

하박국 3장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심판하러 오시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3절을 보라. ‘하나님이 오신다. 남쪽 데만에서 하나님이 오신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바란 산에서도 오신다.’

6절을 보라. ‘그가 서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어서신다.’ 또 ‘그가 보신다. 그리고 그가 행하신다.’

8절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을 타시고 구원의 병거를 모시고 온다.’

9절에는 ‘주께서 화를 꺼내 쏘시고는 강들을 요동케 하여 땅을 쪼개 버리신다.’

12절에는 ‘노를 발하시고’

14절에는 ‘회오리바람을 일으키시고’

15절에는 또 ‘말을 타시고 오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 가운데로 오시고 일어서시는 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비록 그 하나님의 오시고 일어서심이, 우리에게 즐겁지 않더라도, 그 하나님의 오심이 우리에게 유익이 없다 해도, 부흥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로 오시고, 우리 가운데서 일어서심입니다.

그렇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맞아들이는 선지자 하박국은 고통합니다. 아파합니다.

‘지금 땅이 흔들립니다.

창수가 넘쳐 바다가 소리를 치고 큰 소리로 몰려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오시는 소리에 내 창자가 흔들립니다.
내 입술이 떨립니다.
내 뼈가 썩습니다.
마침내 내 몸은, 내 집과 함께 흔들립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오심은 하박국과 이스라엘에게 아픔이었고 고통이었습니다.
뼈가 깎기고, 창자가 썩는 아픔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선지자 하박국은 그 하나님의 부흥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어도,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감람나무에서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어도 그리고 밭에도 거둘 서출이 없어도,
우리에 양이 없고 또 외양간에 소가 없더라도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오심을 기뻐합니다.

이것만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임을 알기에 즐거워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고, 우리의 힘입니다.

단지, 주께서 노하셨을지라도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소서.”

그렇습니다. 부흥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야 진정한 부흥은 시작됩니다.

평생 예수를 기다렸던 세례요한은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로 전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더 가난해져야 한다. 그러나 예수는 가난한대 우리가 얼마나 부자인가. 한국교회에서, 예수는 보이지 않고 사람들만 보인다.

예수는 자기 몸 하나 우리들의 죄 값으로 팔고, 이 세상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팔아 부자 되고 있다. 다음세대를 준비하는 교사들이여! 진정으로 다른 세대가 아닌 다음세대를 보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가난해져야 하고 예수가 흥하고, 예수가 부유해져야 한다. 할렐루야!

얼마 전 한 미국의 존 맥아더 목사는 인터뷰에서, 130년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성경이라고 지적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을 잃어버린 한국교회에게 부흥은 없다. 한국교회 연합을 외치며 가출한 목회자들은 이제 교회로, 강단으로 돌아가 성경을, 복음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

성경을 배우지 않는 교회,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 목회자로 인해... 한국교회는 예수, 그 이름의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부흥이 예수께로부터 오심을 믿어야 한다.

하박국에 보면,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는 온 천하는 잠잠할지어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그 예배로, 그 강단으로, 그 말씀과 성경을 주목해야 한다. 오직 예수! 그가 우리를 살린 것처럼, 그 이름이 우리를 부흥케 하실 것이다. 아멘.

한 사람의 목사로서 한국교회 부흥은, 한국교회 연합을 외치며 세상 밖으로 뛰쳐나온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다시 집으로 가야하며,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집으로 돌아가 가정을 지켜주어야 한다. 교회로 돌아가 무너진 강단을 지켜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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