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6.25 한국전쟁 이후, 23만8천명의 아이가 해외로 입양됐다. 오늘도 우리의 아이들은 계속해서해외로 입양되고 있다. 그것이 세계 11위 경제대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해외입양이 계속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입양아의 고통은 엄마에 의해서 버려지고, 조국에 의해서 버려진 것도 모자라, 입양된 나라에서 또 한 번의 질곡을 겪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한다.

지금부터 30년 전 마산에서 입양된 한 여자아이는 태어난지 4개월 된 간난아이였다. 양아빠는 인디언이었고, 양엄마는 백인이었다. 그래서 이 아이는 인디언이라고 불렸다. 그것은 까만 머리와 눈동자가 인디언 ‘착탁족’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또 이미 한국서 입양된 형제가 있어 서로 의지하며, 입양생활을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분명한 것은 이 아이는 미국인으로 살았으며, 매일 먹는 음식과 생활, 그리고 문화와 가치관도 미국인이었다. 문제는 주변의 사람들이, 아니 이웃들이 미국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웃들은 아이를 향해 “한국어 해 봐”, “태권도 알어” 등 생물학적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족쇄처럼 따라 다녔다. 그는 한국문화를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한국인처럼 행동하기를 암묵적으로 이웃에 의해 강요를 당했다.

그는 이해 할 수 없었다. 미국인 아버지는 공군이었다. 직업상 미국의 여러 주를 돌아다니며, 살았다. 지역마다 입양아를 대하는 태도 또한 전혀 달랐다. 다양한 인종이 있는 켈리포니아와 하와이는 색안경을 쓰고 보는 시선이 작았지만, 백인들이 모여 사는 아이오와주와 캔사스주는 사정이 달랐다.

캔자스초등학교는 전교생 600명중 2명만이 아시아인이었다. 아이들은 “네 눈이 왜 작으냐”, “머리는 왜 새카맣지” 등등… 이 아이의 주변에 둘러서서 놀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 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웃어 넘겼다. 하지만 자라나는 아이에게 있어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 였다.

아무리 놀려도 참았다. ‘버려진 아이’라고 놀렸을 때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눈이 작은 아이는 여러명 있었지만, 부모에게 버림받고, 조국에 의해서 또 버림받은 아이는 자신뿐이었다. 누구도 자신을 변호해주고, 함께 해 주지를 않는다. 그러면서 내조국은 어디이고, 내 친부모는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스물다섯이 되던 해에 자신을 버린 조국, 대한민국을 찾기로 결심했다.
입양아들은 만 18세가 넘으면, 자신을 버린 조국을 방문해 뿌리를 찾는 것이 대부분이다. 매년 2000-3000명이 버린조국을 찾고 있다. 그것은 18세 이전까지 입양기관서 정보 파일 열람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한국에 들어와서 한참 만에 입양정보 파일을 열람했다. 입양기관을 통해 엄마의 주소를 알아냈다. 그것은 엄마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친딸과의 만남을 거부했기 때문에 엄마와 딸은 서로의 생사를 알면서도 만날 수 없었다.

대신 비정한 엄마는 딸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왔다.

‘혜진아, 잘 살고 있니? 미안해’라고 꾹꾹 눌러 적은 답장이었다.

“그래도 엄마가 밉지는 않았어요. 오죽하면 자식을 버렸을까 하는 생각에 그저 딱하다, 안됐다 싶은 마음이었어요”

대부분의 입양아들은 자신을 버린 조국과 부모에 대해서 궁금하다. 그래서 한번쯤은 비정한 나라 조국을 찾아온다. 그들은 입양된 나라에서 이웃들로부터 ‘버려진 아이’라는 비소를 받으며, 살았던과 마찬가지로, 번린 조국의 국민들로부터 ‘불쌍한 아이’라는 동정을 받는 또 한번의 아픔을 겪는다.

왜 한국인인데 왜 영어를 쓰냐, 택시기사로부터 승차거부도 당한다. 고난의 아픔을 딛고 해외에 입양된 아이들이 조국의 품에 돌아와서도,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무엇으로 이들을 위로해야 할까(?).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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