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운동가 고 전덕기 목사.

3.1절을 맞아 민족의 애국자이며 지도자였던 고 전덕기 목사가 재조명되고 있다. 전덕기 목사는 교회의 울타리에서만 활동했던 분이 아니라, 민족과 함께 하나님의 세상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목회자이며, 그의 애국애족정신과 민중과 함께한 목회를 오늘날의 목회자들이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905년 11월 18일 을사조약이 공포되면서 대한제국은 식물국가가 된다. 을사조약이 알려지면서 뭇 사람들은 흥분해서 거리로 뛰쳐나왔고 그들은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몰려들었다. 한 떼의 사람들이 대한문 앞에 꿇어 엎드려 절규했다. 그들은 도끼를 떠메고 있었다. 대개 “역적의 목을 치든지 내 목을 치든지”라는 극단적인 뜻을 상주하는 이른바 ‘도끼 상소’였다.

그들은 대개 기독교인이었고 상동교회라는 교회의 청년회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인솔한 것은 그 교회의 전덕기 목사(이 당시는 전도사였다고도 한다)였다.

전덕기 목사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남대문 시장 숯장수였던 숙부 슬하에서 자랐다. 그의 인생에 서광이 비친 것은 스크랜튼이라는 감리교 선교사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스크랜튼은 양반 동네에 외국인도 많은 정동에서 교회를 꾸리다가 ‘민중이 있는 곳’으로 남대문 안 상동으로 교회를 옮겨 버릴 정도로 가난한 민중들에게 다가서고자 했던 기독교인이었고 전덕기 목사는 그로부터 감화를 받아 독실한 기독교인이 됐다.

새로 이전한 상동은 이른바 상놈들의 동네였고, 전덕기는 ‘애민구휼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극빈자들에게 삶의 기반을 만들어 주고자 노력했다.

전덕기 목사는 11월 10일 일본이 을사 조약 체결 이전 군대를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던 무렵 교회에서 구국 기도회를 개최하여 열렬히 기도를 올린다. “나라가 하나님의 영원한 보호를 받아 지구상에 독립국이 확실케 하여 주심을 예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전덕기 목사는 평안도 교인들을 조직하여 오적 암살을 모의하고 무장 투쟁을 고무하기도 했다. 헤이그로 파송되는 이준도 상동교회에 찾아와 그 임무의 성공을 함께 빌었고, 상동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신민회를 설립하여 대한제국의 마지막 숨통을 끊으려는 일제에 저항했다.

훗날 삼일 운동 후 조선 총독부에서 나온 보고서는 상동교회를 “조선 독립 운동의 근원”으로까지 꼽았다. 전덕기 목사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전덕기 목사는 경술국치 후 민족운동의 뿌리를 뽑으려는 일제에 검거되어 모진 고문을 받는다. 그 후 1914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고문 후유증과 결핵으로 인한 병마에 시달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면서도 마치 바울처럼 편지를 보내는 ‘병상 목회’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목회에 필요한 세 가지 물품으로 ‘마른 쑥과 나막신, 그리고 의지(종이로 만든 약식 관)’를 들었다. 그것은 연고 없는 가난한 이가 돌아갔을 때 마른 쑥을 콧구멍에 꽂고 들어가 그를 염해야 하기 때문이었고 대개 시체 썩은 물이 방안에 그득하므로 나막신이 필요했으며, 그 종이 관에 싸서 망자를 묻어 주었던 자신의 숱한 경험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가 돌아갔을 때 서울 장안은 슬픔에 휩싸였다.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모를 초상꾼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관을 잡고는 목을 놓아 울었다. 가장 슬퍼한 것은 남대문 일대의 거지들 왈짜들, 불한당 소리 듣던 이들이었다. 서울 장안의 기생들도 소복을 입었으며 갑오경장 이래 차별은 없어졌으되 여전히 사람 취급에서 벗어나 있던 백정들도 꺼이꺼이 소울음을 울었다. “우리 선생님이 죽었다. 우리 선생님이 가셨다.” 상여를 따르는 사람들은 십 리를 헤아렸다고 한다.

나이 마흔도 안 된 젊은 목사의 죽음 앞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슬퍼한 것에는 마땅히 이유가 있다. 망해 가는 나라를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도끼를 들고 달려 나가 “조약을 거두시든지 내 목을 치라”고 자신의 황제에게 호소하던 목사. 대한제국에서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썩은 시신들을 거두는데 이력이 났지만 동시에 산 송장과 같은 매국노의 목숨을 거둘 의거를 계획하던 목사. 그의 생애를 돌이키면 사람들이 그리도 슬퍼한 이유를 찾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전덕기 목사의 활동 영역은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의 발걸음은 교회 울타리를 넘어 시장바닥과 세상에까지 미쳤다. 그의 영향력은 감리교회를 넘어 교파와 종파를 초월했으며 종교와 관련이 없는 세속 사회에서도 통했다.

전덕기 목사는 을사조약이 체결됐을 때 민족을 위해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무효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는 목회자의 올곧은 신심과 애국정신으로 신민회 조직 재건운동과 구국교육사업 등을 전개하며 구국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전덕기 목사는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그 안에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을 조직하고 이를 확대시켜 ‘상동파’라는 방대한 항일민족세력을 구축했다. 향후 이 조직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 조직의 기반이 됐으며 YMCA로 이어지는 기독교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큰 흐름을 형성하게 됐다.

특히 한말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은 구국기도회로부터 시작해 조약 무효 상소운동, 항일비밀결사(신민회) 조직과 투쟁, 친일파 매국노 응징과 무장투쟁 등 다양했으며, 그 중심에 전덕기 목사의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이 있었다.

전덕기 목사의 지도력과 영향력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 사회와 민족운동에까지 미쳤다. 그의 애국정신은 무엇보다 신실한 믿음과 헌신적인 목회 철학에서 출발했다. 일반 사회운동과 민족운동, 교육운동에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목회자로서의 정체성과 역할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신학자이기 전에 목사였고 저술보다는 행동하는 실천적 목회자였다. 그의 모든 힘의 근본은 성서와 기도를 바탕으로 한 기독교 신앙이었으며 민족의 영혼을 깨우는 영적 각성이 신앙에 기초했다.

전덕기 목사는 개인적 ‘영혼구원’뿐 아니라 민족적 ‘사회구원’을 추구했다. 그는 교회 뿐 아니라 교회 밖의 일반 민족 사회까지도 목회의 영역으로 삼고 지도력과 영향력을 발휘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민중을 깨치고 해방시키는 민중 목회자였다. 그는 민중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며, 민중의 자각과 역사 참여를 강조했다. 특히 그는 성경에서 ‘만민 평등’과 ‘동등 인권 사상’을 발견했다. 그는 ‘반봉건’ 민중 주체의식이 강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봉건 사회 체제의 수혜자였던 양반, 상류계층의 비생산적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자신이 민중 출신이었을 뿐 아니라 그는 남대문 시장 바닥 일대를 돌며 거리로 나가 설교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 보니 거리에서 그의 전도를 듣고 나온 교인 대부분은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계층이었다. 스크랜턴 선교사의 뒤를 이어 한국인 최초로 담임목사로 부임해 그가 목회했던 상동교회의 주요 과제는 가난한 교인을 구제하는 일이었다.

3.1절을 맞아 고 전덕기 목사의 삶은 기독교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며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한 상황에서 전덕기 목사의 생애는 ‘과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가슴 속에 커다란 울림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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