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인간은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지혜를 자랑하고, 지식을 자랑하지만 정작 때를 주관하고,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 앞에서는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전도서가 들려주는 예화가 있다. 한 작은 성읍을 무너뜨리기 위해 어떤 왕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포위하고 있을 때, 그 성안에 지혜로운 자가 있어서 그 성을 구했음에도 그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를 기억해주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전 13:16)고.

인간은 지혜를 얻고자 하면서도 눈앞의 지혜는 멀리하고, 전문가를 찾는다면서도 정말 전문가는 도외시한다. 그가 유별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지혜를 담아내고, 지식을 식별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정작 행복의 길은 외면하는 게 인간이요, 행복이 주어져도 누리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인간은 그만큼 불완전한 존재이다. 사물과 시간의 앞뒤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고 있지 못한 게 인간이다. 한때는 유용한 사상이었지만, 시절이 바뀌면 쓸모없게 되고, 한때는 쓸모없는 사상이었지만 시대가 흐르고 나면 유용한 사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통수권자가 오직 하나의 방법에만 몰입하는 것은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가지를 하지 말라고 하신 바가 있다.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부르지 말라.”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이 세 가지는 유대사회에서 최고의 존경 대상이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누구를 막론하고 랍비 대접을 받고, 율법의 아버지 대접을 받고, 지도자 대접을 받기를 원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진정한 랍비가 되고, 진정한 율법의 아버지가 되고, 진정한 지도자가 되려고 절치부심하기보다는 껍데기만을 흉내 내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 그런 허위와 위선을 정면으로 부정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게 ‘아니다’고 몸으로 보여 주신 결과가 고난의 십자가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고 하셨을 것이다. 예수께서 진정으로 원하신 것은 당신을 향한 환호가 아닌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라가 국난의 위기에 처했다며 온갖 잡설을 늘어놓고, 친박, 진박, 비박으로 갈려 싸우는 자들을 보면 위선자가 따로 없어 보인다.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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