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예수께서 솔로몬 행각을 거니실 때이다(요 10:22-33). 유대인들이 몰려와 예수를 에워싸고 ‘당신이 누구인지 밝히라’고 다그친다.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데도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자 ‘감히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니!’ 라며 예수를 돌로 치려고 달려든다. 그러면서 하는 말, “선한 일로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참람함(신성모독) 때문”에 돌로 치려는 것이라고. 스스로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을 돌로 쳐 죽이고자 하는 자들의 궤변이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온갖 술수를 동원하여 하나님을 부정하는 게 인간이다.

영화 [밀양] 이야기다. 아이를 죽인 살인범이 피해 어린이 어머니에게, “저는 주님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았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십니까? 남을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도록 제가 기도해드리겠습니다.” 기막힌 일이다. ‘행복한 가해자’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피해자에게 회개하라고 설교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들이 벌이는 파렴치라고 해야 할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내가 누구인가를 알지 못하는 데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즉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그럼 무엇에 의해 구원받는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구원받는다.

사순절에 우리가 돌이켜볼 일이 있다. 내가 예수로 인해 ‘행복한 사람’이라면, 나로 인해 주께서 고통을 겪으신다는 사실 또한 직시해야 한다. 자신의 행복에 취해서 타인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죄악이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데서 오는 행복이라야 참된 행복일 수 있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야말로 구원받아야 하는 인간의 기본자세이다. 사순절은 ‘예수로 인해 행복한 사람들’이 주께서 겪으신 고통을 함께 공감하는 절기이기도 할 것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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