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셔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떠돌이, 그리고 어린이 등 인류 모두에게 부활의 새 희망을 주셨다. 하지만 부활계절인 3월, 죽임을 당한 자들의 ‘피의 소리’, ‘한의 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통곡하고 있다.

꽃다운 어린 생명을 차가운 바다 속에 내던진 세월호 참사는 아직도 제대로 매듭지어지지 않은 채 표류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위안부로 끌려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받은 일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한의 눈물’도 아직까지 마를 줄 모르고 있다. 또 우리의 아이들이 친부모와 계모, 그리고 계부, 이웃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있다. 곳곳에서 아벨의 ‘피의 절규’가 메아리치고 있다.

국내를 넘어 동북아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도 전쟁과 테러의 위협 속에서 수많은 생명이 희생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서는 탐욕에 길들여진 가진 자들에 의해 수많은 아이들이 가난과 배고픔 속에서 앙상한 뼈를 드러낸 채 죽임을 당하고 있다. 또 내전을 피해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떠난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지중해에 수장되고, 주검으로 발견되고 있다.

기독교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죽임에 관심을 갖고, 그 억울한 죽임에 저항하는 생명의 종교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고 있다고 말씀하셨고, 히브리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죽어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고, 구해 내셨다.

기독교가 죽임에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구주되시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불의한 권력자들에 의해 살해당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 억울한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에 기독교는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갖는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죽임의 세력에 저항하는 종교이고, 억울한 죽임을 당한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종교이다. 기독교는 죽이는 세력과 살리는 힘에 관심을 둔다. 따라서 죽이는 힘에 대한 저항과 극복이 과제가 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사회 역사 운동으로 이어진다.

기독교를 생명의 종교라 말하는 것도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통해 부활에 동참할 수 있는 자격을 주셨다. 그 누구든지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영생의 복을 받을 수 있으며, 에[수님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분명한 것은 동네마다 세워진 교회들이 죽임을 당한 자들의 ‘피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의 입에서 북한 어린이에 대한 인권에 대해서 강하게 말하면서, 왜 친부모, 계부와 계모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우리의 어린이들에 대해서 침묵하는가. 참 아이러니 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에 죽임당하는 이웃들에 대해서 한번쯤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 한국교회 부활의 계절 현장에서 ‘죽임’ 당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한다. 대신 교세를 과시하고 뽐내기 위한 일회성 행사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그 사건을 돌아보면서, 지금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더 십자가에 매달고 피를 흘리도록 하는 무리가 아닌지 생각해 보자. 그 무리가 바로 지도자를 자처하며 거드름을 피우는 목회자들과 사회 곳곳의 고난 현장을 외면한 채 이기심에만 가득 찬 우리 자신은 아닌가. 부활의 계절인 오늘 죽임을 당하는 이웃의 ‘피의 절규’를 듣자. 그리고 한의 사제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자.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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