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부활절을 목전에 두고 사진기사 하나가 마음을 스산하게 했다. 두산그룹 계열 두산모트롤이 명퇴를 거부한 직원들의 책상을 벽면을 향하게 한 사진이다. 회사는 1시간의 점심시간과 오전오후 15분씩 두 차례 휴식시간을 빼고는 하루 종일 벽을 보고 앉아 하릴없이 대기하게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기업의 슬로건은 ‘사람이 미래다’란다. 문제는 두산그룹만이 아니라는 데 있다. 최소한의 인권의식도 없는 게 한국 기업들의 현주소이다. 기업이 살아야 사람이 산다? 그건 인공지능 살려야 사람이 산다는 말과 뭐가 다를까. 사람 살리지 못하는 기업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되물어야 하다. 승자독식은 있어도 패자부활이 없는 세계는 문명세계일 수 없다. 성경이 부활을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창조를 말하면서 동시에 구원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2이사야 이야기다. 제2이사야는 야훼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구원의 주시라고 선포한다. 바빌론 포로생활을 겪으며 야훼 하나님을 창조주로 선포한 것은 마르둑 신을 창조신으로 섬기는 세계에 대한 저항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것은 마치 로마의 가이사를 주로 섬기던 시대에 ‘예수가 주이시다’고 고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목숨 건 선포인 것이다. 제2이사야는 여기서 더 나아가 감히 구원의 주 하나님을 선포한다.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기만 하다면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약한 자들의 희생은 자연선택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리하여 제2이사야는 억압과 수탈 가운데 있는 이들을 적자생존의 비정함에 방임하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한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비루한 처지로 살아가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빌론의 정치․문화적 억압으로부터 자존감을 지키게 했고, ‘구원의 주 하나님’은 바빌론의 절망과 죽음에 맞서 일어서는 힘과 용기를 갖게 했다.

제2이사야 시대에는 문화적 종속과 정치적 억압이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었다면, 오늘날은 화려한 세속 문화와 거대 자본의 횡포 아래서 벼랑 끝으로 내몰린 개개인은 전전긍긍하고 있다. 바빌론 포로시대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터널 가운데서 절망했다면, 오늘날은 휘황찬란한 인공조명과 기업 살리기 구호 아래서 서민들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가고 있다. 왜 기업이 살아야 하는 지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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