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박근혜 대통령이 유승민 의원을 두고 했다는 ‘배반의 정치’가 정치권을 혼잡스럽게 하고 있다. 배반이라면 유다를 빼놓을 수 없다. 유다가 처음부터 악의적으로 예수를 이용하기 위해 제자로 위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분명 유다는 예수의 마력(?)에 끌려 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유다는 남다른 열정과 현실 감각을 지닌 사람이다. 그런 유다가 스승 예수를 배반한 동기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해야 한다면 ‘신뢰’와 ‘신용’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예수는 유다를 ‘신뢰’하여 제자로 삼았고, 유다는 예수를 ‘신용’하여 제자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는 것이다. 신뢰는 인격에 기초하고, 신용은 계량화된 가치에 기초한다. 신뢰는 무조건적이고, 담보 능력이 중요한 신용은 조건적이다. 가령 은행에서 대출할 때 우선 고려하는 것은 신용이지 신뢰가 아니다. 아무리 신뢰할만한 사람일지라도 빚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은행은 대출해주지 않는다.

유다의 눈에 예수는 분명 신용할만한 사람이다. 다중을 압도하는 눈빛, 반대자들을 전전긍긍하게 하는 변론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 보통 사람들은 결코 지닐 수 없는 기적의 행사. 무엇보다 수많은 추종자들을 보면 세상을 뒤집고도 남을 만큼 대단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판단력이 빠른 사람이라면 그런 이를 놓칠 수 없다. 신용의 관점에서 예수는 수퍼VVIP등급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알고 보니 예수의 능력은 유다의 눈에 비친 허상이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다른 제자들도 피장파장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가 지닌 능력을 보고 믿는다면 그것은 예수를 신용해서 믿는 것이지 신뢰해서 믿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예수에게서 얻을 것을 기대하고 믿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의 정치판처럼, 언제든지 유다가 될 수도 있고, 유다라며 내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예수께서는 그런 우리를 유다에게 그랬던 것처럼, 끝까지 신뢰하신다는 사실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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