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교인들이 무서운 나머지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것은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상실한 것이다. 이것은 교회와 나라, 그리고 가정이 무너져도, 목회자 자신만 괜찮다는 안일주의에서 나온 잘못된 생각이다”

이 말은 지난 5일 모 정당의 지도자 모임에서 두 번에 거쳐 야당 국회의원을 지낸 김모 장로의 발언으로 목회자들이 안일주의에 사로잡혀, 반기독교적인 이슬람 확산과 동성연애법, 차별금지법 등의 잘못을 인식하면서도 왜 침묵하느냐는 질타의 말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다. 인권이라는 이름 아래 성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다수의 인권을 침해하는 동성연애법을 비롯한 차별금지법에 대해 정교분리정책을 내세워 침묵하는 일부 목회자들을 향한 일침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이 말을 들으면서, 한국교회 지도자와 교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의문을 품으면서, 김 장로의 말은 옳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민주화운동의 과정과 일제36년의 식민지 아래서 예언자적인 사명을 망각하고,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온갖 혜택을 누렸다. 그리고 권력자의 입이 되어 대변자를 자처했다. 한마디로 피압박민족과 고난당하는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며, 영미 선교사들이 가져다가 준 정통보수주의의 싸구려 ‘구원’만을 전달하는데 경쟁을 벌였다. 그 결과 정치권은 한국교회가 목소리를 높여 외친 반기독교적인 종교인과세를 비롯한 동성연애법, 차별금지법, 인권법, 이슬람 확산 저지 등에 대해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역사 속에서 초기 한국기독교는 일본식민지 세력의 속셈과 영미의 팽창주의가 맞아 떨어져, 일본침략에 침묵하며, 기독교인의 의식화를 두려워 한 나머지, 선교사들이 자처해서 ‘정교분리정책’을 내세워 일본침략을 정당화 해 주었다. 대신 한국기독교는 원산을 비롯한 평양 등지에서 각성운동을 벌이며, 조선의 백성들을 향해 회개와 구원을 외쳤다. 피압박 민족인 조선의 백성이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기에, 선교사들이 회개를 왜 그렇게 강조했는지 선교 130년이 지난 오늘 묻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 등 기득권자들을 향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백성은 가던 길을 멈출 수도 없었다. 멈추면 배곯아 죽어야 하는 형편이었으며, 침략세력에 의해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난하고, 천박한 백성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했으며, 조선의 백성들이 받아들였겠느냐는 것이다.

당시의 한국교회지도자 모습은 한마디로 선지자, 아니 예언자의 사명을 망각한 것이었다. 그 이후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일제 국가주의에 굴복, 신사참배에 참여하는 등 배교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일부 기독교지도자들은 조선의 청년과 소녀들을 향해 일본군 총알받이와 정신대로 나갈 것을 강연하고 다녔다. 피압박 민족에게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기는커녕,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이들을 전장의 한가운데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한국기독교는 해방 이후 고난당하는 이웃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교회가 민주화운동에 가담하려는 움직임을 감지한 박정희 정권은 또 다시 선교사들이 주창했던 정교분리정책을 내세워, 교회의 정치참여를 철저하게 봉쇄했다. 오늘 기독교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교회가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시 한국기독교는 고난당하는 노동자와 학생, 빈민, 지식인들에 대해서 침묵하며, 이들을 향해 비난의 칼날을 세웠다. 오늘 한국교회가 반기독교적이며, 국민 대부분이 공감하는 동성애법, 차별금지법, 이슬람 확산저지를 위한 기독교정치세력화가 정치권에 발목이 잡혀 있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마디로 선교사들에 의해서 주창된 ‘정교분리정책’이 기독교의 정치세력화의 발목을 잡는 꼴이 됐다.

선교초기 한국기독교가 뿌린 씨앗인 ‘정교분리정책’이 기독교정치세력화의 일보 전진을 막고 있는 것이다. 오늘에 와서 교회의 지도자가 할 말을 못하고, 침묵하는 것에 대해 선지자의 사명을 망각했다고 말하니…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