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마태와 마가는 한 귀신들린 사람을 통해서 집단주의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마 8:28-34; 막 5:1-17).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귀신들린 사람은 줄곧 ‘우리’ 라고 집단의 힘을 과시한다. 예수께서는 ‘우리’ 라고 말하는 귀신들린 자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내 이름은 군대”다. 그의 대답이다. ‘군대’의 헬라어 표기는 ‘레기온’이다. 3,000∼6,000명으로 편재된 로마의 군단으로 황제의 명령 외에는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조직이다. 그리하여 ‘레기온’은 저항할 수 없는 힘, 곧 개개인이 부정된 집단의 괴력을 웅변한다. 귀신들린 자는 지금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지 못하고 자신을 ‘레기온’이라는 무소불위의 힘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무엇인가를 파멸시킴으로써 종말을 고하는 집단이기도 하다. 그가 공동묘지를 중심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산 자의 땅이 아닌 죽은 자의 땅을 은거지로 삼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마가가 말하는 ‘레기온’은 현실에서 누구를 지목한 것일까? 우선 당시 유대민족을 억압하는 로마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인에게 로마야말로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의 실체이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로마에 저항하는 또 다른 레기온 즉 ‘나’는 없고 ‘우리’라는 집단의식만을 지닌 존재. 예컨대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하는 명분으로 자국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자들. 민중을 대변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이 민중에게 악마가 되고,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자국민을 억압하는 자들. 민중운동 혹은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내편이 아닌 모두를 적으로 여기는 이들 역시 레기온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보이지 않고 돈만 보이고, 삶의 다양성을 보지 않고 획일적 가치만을 고집하는 자들. 패자는 보이지 않고 승자만 본다면 그 역시 레기온이다.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 집단 몰사한 것은 레기온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떼로 움직이고, 결국은 떼로 죽음에 이르는 운명 말이다. 아무리 대의명분이 선할지라도 ‘나’를 상실한 ‘우리’만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바로 귀신들린 것이고, 레기온에 사로잡힌 것이다. 선거를 목전에 두고 곳곳에서 레기온이 발호하는 것 같아 생각해본 것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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