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동 한 장로(강남향린교회)
생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서에서도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온통 일맥 관통하는 주제어는 ‘생명’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거기에 영혼을 불어넣어셨다는 그 말씀 속에 이미 생명의 중요성은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생명을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여 바라보는 시각의 확산으로 생명경시의 풍조는 극에 달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 자체가 생명을 이야기한다면 죽음이라는 공포에 휩싸여있는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제시하시면서 참삶이 무엇인가를 경고하신다.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생명존중사상을 바탕으로 생명의 존귀함, 존엄함, 위대함을 이 땅에 발현하는 삶이 바로 기독인의 참 삶이라는 전제와 확신이며 실천이다.

생명존중이라는 정언명령을 생명경시풍조가 만연되어있는 21세기 현실사회에서 어떻게 복원시킬 것인가는 아주 어려운 문제가 되어버렸다. 생명경시풍조의 확산은 인구증가와 비례한다. 그것은 언론의 보도태도에서 극명히 나타나고 있다. 즉, 100년전에는 자전거를 타고가다가 다친사건도 크게 보도한 반면 지금은 대형사고나 특이한 사건으로 생명을 잃는 경우가 아니면 언론에 보도조차 되지 않는다. 사람값이 금값에서 돌값으로 전락했다는 증거이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사람값이 폭락했다는 경제가치론은 반하나님적이고, 반윤리적이며, 반생명적이다.

벌써 2주년이 지난 4.16 세월호 참사사건은 생명경시풍조의 결정판이다. 출항부터 사고 후 지금까지 보여준 정부당국의 모습은 그야말로 살인에 가까운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과적 등에 대한 점검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출항을 했다든지, 사고 후 구조작업에서 보여준 인명경시풍조는 차마 눈 뜨고 못 보겠고 귀 열고는 못 듣겠는 그러한 상황이었다. 아직도 9명이 미수습된 채 실종자로 낙인찍혀 있다. 더 잔인한 짓은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극도의 테러행위들이다. 진상규명을 고의적으로 방해하는가 하면, 유가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온갖 못된 행태들이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뿐인 생명에 대한 인식과 가치가 같은 생명에 의해 그리고 그 생명이 만든 모든 인공적 재해에 의해 철저히 망가지는 현 시대의 사회상황은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인간에게는 역설적이게도 지옥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이 세상을 불완전한 인간들이 철저히 망가뜨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떠한 생명사상과 영생을 꿈꿀 수 있을까? 그 답은 오직 하나, 부활의 생명이다. 부활신앙이 핵심요체인 종교는 오직 기독교뿐이다. 그 부활은 신실한 신앙인으로 살면 죽은 후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당하는 참 삶을 살아야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처럼 산다는 것은 어떠한 삶일까? 겉으로 시늉으로만 죽음을 각오하고가 아니라 온갖 불의와 부정 그리고 부조리에 당당히 항거하여 정의, 평화, 생명을 살리는 그러한 삶을 살다가 죽임을 당했을 때 그러한 삶이 예수처럼 사는 삶인 것이다. 독일의 나찌하에서 히틀러 암살계획을 세웠던 본회퍼 목사의 삶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귀감이 될 만한 예수처럼 산 삶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강점기 시절 피압박 식민지 상황에서 억압자들을 향해 폭탄을 던졌던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강우규 의사 등 수많은 의사들의 삶은 더 큰 생명, 더 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억압자들을 제거하는데 당당히 나섰던 삶이기에 진정 예수처럼 산 삶이라고 할 것이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숭고하고 가장 존엄한 생명, 각자에게는 오직 하나뿐인 그리고 한번 뿐인 ‘생명’의 위대함을 새롭게 인식하고 생명이 존중되는 사회를 복원하기위해 우리 기독인들의 삶은 날마다 기도하고,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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