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오늘 우리의 아이와 세계의 아이들이 어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축복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이들을 거부했다. 이 광경을 본 예수님은 노하셨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막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이들의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어린이를 기준 삼는 말로 “누구든지 어린이 같이 하나님나라를 맞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다. 그렇다 어린이는 순수하다. 그리고 맑다. 예수님께서 이런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런 어린이들이 부모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있다. 또 어른들의 전쟁 놀음에 이용당하고 있다. 종교 간의 분쟁과 민족분쟁에서도 이용당하고 있으며, 이를 피해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떠났다가 바다 속에 수장되는 아픔을 당하고 있다.

여기에다 세계의 많은 아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다. 부자나라의 아이들은 먹을 것이 차고 넘치는데, 아프리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은 아사상태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다. 이것은 모두 성서의 중심사상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인 ‘나눔’을 실천하지 않은 결과에서 온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이렇게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어른들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은 형 카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아벨(이웃)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계시다. 하나님의 크신 인간을 향한 사랑과,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를 드러낸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말한 ‘어린이와 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정론은 없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린이들의 도덕성이나, 윤리는 아니다. 종교성도 아니다. 말하자면 저들의 ‘공적’과는 상관이 없다. 있다면 성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어린이’라는 자체가 인정된다. 새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전형적인 기준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막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이들의 것이다”라는 선언은 제자들의 태도에 반영된 유대교의 어린이 관의 배경에서 보면, 가난하고 소외되고 힘없는 사람들의 범주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천국이 이들의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도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하시며, 이들 속에서 역사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시대 당시 어린이는 바리새 체제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었다. 바리새 체제는 계율을 알고, 지킬 수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즉 성인의 체제였다. 그래서 어린이를 명시했다. 이러한 어린이가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운 가치의 기준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가치의 기준이 무엇에 의해서 성립되는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죽을 수 있는 대상이 뚜렷한 경우이다. 한마디로 어린이를 위하는데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낄 때 비로소 나의 가치가 된다는 사실이다.

5월 5일 어린이날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가장 행복하고, 사랑을 받아야 할 우리의 아이들이 어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있다. 또 먹을 것이 없어 아사상태서 죽어가고 있다. 어른들이 만든 전쟁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종교분쟁의 가장 피해자이다. 보다 낳은 삶을 찾아 떠난 난민 어린이들이 지중해 한가운데서 주검으로 발견되고, 여자아이들은 어른들의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어린이날을 맞아 죽임을 당하는 아이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이들 것이다”고 선언한 예수님의 뜻을 조용히 묵상해 보자.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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