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향해 반역을 도모할 때이다. 압살롬은 교묘하게 아버지의 정치적인 약점을 이용했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직접 민생을 챙긴 것이다. 그러자 평소 다윗에 대해 소외감을 지닌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의 자상함과 겸손함에 마음이 끌렸다. 마침내 압살롬은 헤브론에서 거사를 일으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하지만 신명기 역사가는 이런 압살롬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한 자’(삼하 15:6)라고 혹평한다. 민생을 챙긴다며 간교하게 지방색을 이용한 압살롬의 폐부를 찌르는 말이다. 백성들의 고충을 살핀 압살롬의 자상함, 백성들에게 보인 겸손은 아버지의 나라를 도둑질하기 위한 위장술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생애 막바지는 권력의 정점인 예루살렘을 향하는 것이었다. 이를 제 나름으로 눈치 챈 제자들 사이에서 권력 다툼이 일었다. 예수께서 영광 받으실 때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이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다”(막 10:45). 대속의 제물로서의 섬김 즉 속건 제물로서의 섬김을 말씀하신 것이다.

구약에서 속죄제의 경우 제사장은 제물을 바치는 자를 대신하지만, 속건제의 경우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신한다. 예수께서 속건제의 제물이 되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보상하기 위해 친히 제물이 되신 것을 말한다. 제주가 죄 지은 자에게서 제물을 받아 보상받지 않고, 자기를 희생 제물로 삼아 죄 지은 자의 죄를 보상하신 것이다. 이처럼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섬김은 자기를 비참하게 하면서까지 베푸신 섬김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대속의 은혜 때문이다. 누가 감히 이와 같은 섬김을 흉내 낼 수 있겠는가. 그러함에도 우리의 섬김은 주님의 섬김을 모범으로 삼아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국민을 섬기겠다’며 읍소하고 국회의원이 된 선량들. 그 마음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압살롬처럼 유권자의 마음을 도적질하기 위한 위장술이었는지 각자 자기행위에서 드러날 것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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