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양심’이란 두 글자는 분명하면서도, 그것처럼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 없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흔히 “양심에 손을 얹고 물어보세요”라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양심적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 그렇지 않을 때 양심의 회의를 느낀다. 칸트는 양심을 “인간 내적 재판정의 의식이 양심이다”고 했다. 프로이드는 양심을 “감정적인 가치를 넘어선 인간행위가 갖는 제반동기에 대한 삶의 확실성의 표상”이라고 했다.

양심은 객관적인 투명체가 아니다. 주체적으로 객관적인 것과의 합일을 동의하는 기능이다. 융은 양심의 이중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는 본능적인 것이고, 하나는 객관성을 말한다. 즉 참된 양심과 그릇된 양심으로 구분한다. “그릇된 양심은 과장하고 왜곡하여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독일의 진보적인 신학자 본회퍼는 나치스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것은 본회퍼가 양심에 의해 행동했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나치스 정권의 횡포로 신과 인간 사이의 분열을 초래하는 현실을 바로 자기분열과 같은 것으로 절감하는 양심의 소리 때문에 행동했다.

본회퍼는 “인간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의 분열의 부끄러움을 의식하는 것은 자체 내의 분열의 표식이며, 자기분열의 동일성에서의 부름이다”고 했다.

결국 본회퍼는 나치스의 손에 죽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의지 때문에 양심을 추방할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와 같이 독재자는 언제나 비판을 싫어한다. 그리고 비판의 주역을 담당하는 지식인이나, 종교를 증오한다. 그러면서도 양심의 소리를 가장 무서워한다.

때문에 독재자들은 지식인이나, 종교를 말살하려고 한다. 또 권력과 금력을 동원해서 양심을 마비시키기 위해서 혈안이 된다. 한마디로 독재자들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 자신의 양심을 마비시킨다. 이들에게도 양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심보다는 권력을 선택한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심관>은 그리스도에게 항의 한다.

“너는 양심을 통제하는 대신 심화했다. 혹시 너는 악과 미의 자유로운 선택보다는 안정, 나가서는 차라리 죽음을 원한다는 것을 잊은 것이 아니냐? 사람에게는 양심의 자유만큼 유혹적인 것이 없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만큼 그를 더욱 자학하게 한다. 네가 양심의 안정을 위한 철통같은 법을 주는 대신 이례적이며 불가해한 부동적인 것을 추구하며 사람의 힘에 겨운 것들만 선택하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행위다……”

이 항의는 양심과 지배욕이 대결하는 단면을 보여준다. 지배욕은 양심의 마비를 위해서 안전 할 때는 의지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자유라는 것은 배격하는 대신 일사불란의 통치법을 수립해야 한다고 보며, 그런 통치를 방해하는 것이 바로 양심의 자유를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치권에 대한 양심적 비판을 준엄하게 다스린다. 반면 양심의 약화를 위해서 향락문화를 활짝 열어놓거나, 어용종교를 동원해서 숙명론을 펴거나, 아니면 타계적 신앙을 고취하게 하여 길들여진 짐승처럼 통치권에 무조건 복종하게 하거나, 최대한 간접하지 않도록 하는 정책이 권력욕의 모델처럼 되어 왔다.

이와 같은 양심말살정책으로 많은 양심이 짓밟혀서 낡은 걸레조각처럼 땅에 버려졌다. 그러나 어떤 권력도 양심을 깡그리 말살하지는 못했다. 종당에는 그 안에서 살아남은 양심의 위력 앞에 굴복하고야 만다. 역사는 이를 증명했다.

 /인천 갈릴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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