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복음은 본질적으로 두 가지를 변화시킨다. 개개인을 변화시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고, 사회를 변화시켜 사람들을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킨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들은 이 두 가지 사역에 치명적인 무능을 드러내고 있다. 개개인을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사회를 변화시키지도 못한다. 왜 그럴까? 오늘날 교회들은 죄인을 눈물로 통회케 하는 일이 없다. 사회 구조적인 죄악을 질타하는 일이 없기에, 조직 안에서 악행에 익숙한 사람들을 돌이키게 하지 못한다. 오히려 버려야 할 세속의 욕망으로 펄펄 끓게 한다. 이유가 있다. 교회들이 세속에 동화되어서다. 욕망의 포로가 되어서다.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다. 그도 아니면 위선으로 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 그 극단적인 예를 복음서와 이스라엘의 처음 왕인 사울에게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자 바리새인들은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라며 의논한다(막 3:1-6).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 평소 서로 상종도 안 하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예수를 죽이기 위해 손을 잡은 것이다. 예수께서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위선의 가면을 쓴 사회 구조적인 악을 폭로하신 데서 드러난 모습이다.

사울 왕 이야기는 더욱 참혹하다. 요나단은 사울의 맏아들이다. 군 최고 지휘관인 천부장에 아버지 뒤를 이어 받을 왕위 계승권자이다. 그런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이 정적 다윗을 죽이려 할 때마다 필사적으로 다윗을 보호한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사울은 분노가 치밀어 “이 사생아 같은 놈!” 이라며 길길이 뛰며 당장 다윗을 잡아오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에게 대꾸한다. “죽일 놈이라구요? 다윗이 무슨 짓을 했다고 그러십니까?”(삼상 20:30-34). 순간 사울은 단창을 뽑아 요나단을 향해 던져 하마터면 요나단이 죽을 뻔한 일이 벌어진다. 자신의 왕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친구의 생명을 살려낸 요나단이야말로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복음이 움직이는 곳에서는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한편으로 개개인을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하고, 다른 편으로는 그가 속한 사회를 변화시킨다. 한쪽에서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 일어나고, 다른 한쪽에서는 죽음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나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복음은 새로운 역사를 일으킨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교회에 기대하는 것이 바로 그러할 것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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