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카톡에 친구로부터 33세 된 어느 주부의 감동적인 글이 올라왔다. 혼자 보기에는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공유하기 위해 글의 내용을 소개 한다.

이 주부는 32살에 남편을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리고 분가해서 행복하게 1년을 보냈다. 그런데 하루는 남편이 홀로 계신 아버님을 모시자고 제안해 왔다. 좋다고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대기업에 다니는 형님이 계신데 우리가 왜 모셔야 하느냐고 남편과 많이 다투었다.

하루는 남편이 술에 취해서 울면서 말했다. “뭐든 다른 것은 하자는 대로 할테니 제발 이번만은 부탁 좀 들어줘라” 남편은 어린 시절 사고뭉치였다. 아버님은 뒷수습하기에 바쁘셨다. 남편은 트럭에 치일 뻔 했을 때, 아버님이 대신 사고를 당하셨다. 그것 때문에 아버님은 지금도 오른쪽 어깨를 제대로 쓰지를 못하고 계시다. 아버님은 막노동을 하셨다. 남편은 전역을 하고서도 26살까지 놀기에 바빴다.

아버님은 남편을 늦게 낳았다. 막노동을 하시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셨다. 겨울만 되면 아파서 괴로워하신다. 아버님은 형님과 남편에게 결혼이후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자신은 전셋집에서 전전긍긍 하셨다. 남편은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사시는 것을 보면, 눈물이 절로 나온다고 아버님을 향한 사랑을 그대로 드러낸다.

남편 혼자의 월수입은 150만원 정도. 아버님이 오시면 아무래도 반찬을 신경써야 하고, 여러 가지 힘들 것 같았다. 그 때 임신 3개월 이었다. 형님은 아버님을 절대로 못 모신다고 못을 박았다.

어찌하겠는가. 남편이 가절히 호소하는데...그래서 모시기로 결심 했다. 그리고 모셔 왔다. 처음에 아버님은 오시지 않으려고 하셨다. 자신이 짐이 된다는 것이었다. 설득에 설득을 해서 아버님을 모셔왔다. 정말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아버님은 매번 신경을 써서 식사를 차려드리면, 미안해 하셨다. 어쩌다가 고기반찬을 해 드리면 드시지 않고, 남편이 오면 주셨다. 그리고 저를 먹으라고 드시지를 않았다. 거기에다 집안 청소까지 하셨다. 못하게 하시면, 운동을 하는 것인데 괜찮다는 것이었다. 식사를 하시고 며느리에게 미안해서 인지 설거지까지 하시는 것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아버님은 아침에 나가시면 저녁에 들어오시는 것이었다. 용돈을 드려도 받지를 않으셨다. 그것도 웃는 얼굴로 나가셨다. 하루는 주인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오다가 이집 할아버지를 봤는데 유모차에 박스를 실어서 가던데...”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하루하루 박스를 주워서 돈을 버신 것이다. 너무 죄송해서 엉엉 울었다. 남편한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남편은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평소보다 남편은 일찍 집에 돌아와 아버님을 찾으러 나갔다. 손에 들고 들어오시는 봉지안의 과일과 과자는 아버님의 땀과 사랑이었다.

못난 며느리 눈치를 안보셔도 되는데, 그게 불편하셨던지. 아들집에 오셔서도 편하게 못 지내시고, 눈치만 보시다가 불편한 몸으로 일을 하셨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친정에 우리 아빠도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이날 따라 아빠의 이마에 훈장으로 남은 주름과 갈라진 손바닥이 머리에 떠올랐다.

남편이 나가고 한 시간쯤 지나 남편과 함께 아버님이 돌아오셨다. 아버지를 보는 순간 ‘미안해요’, ‘미안해요’ 가슴속으로 마음껏 소리만 질렀다.

“아버님 제 눈치 안 보셔도 되요. 제가 그렇게 나쁜 며느리 아니잖아요. 아버지의 힘드신 희생이 없으셨다면 지금의 남편도 없었어요. 그리고 지금의 저와 뱃속의 사랑스러운 손자도 없었어요. 저는 아버님을 싫어하지 않고 정말 사랑합니다. 아버님! 그러니 항상 건강 하시고 오래 오래 사셔야 돼요. 허리띠 졸라매고 알뜰하게 열심히 살게요”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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