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마리아인을 모범적인 이웃으로 선택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충격적이면서도, 도전적이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문제를 사마리아인을 관련시킴으로써 유대교적인 신앙과 교리에서 벗어났다.

사마리아인은 종교와 율법적인 지식과 거리가 멀다.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볼 수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생명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생명은 죽음을 거부한다. 또 생명은 생명에 응답한다. 생명은 생명을 낳고 생명을 지킨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생명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사고로 상처를 입고 죽게 되었는데도 못 본척하는 부모는 없다. 만약 그런 부모가 있다면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부모들 중,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부모가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에 의해서 살해되고,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 안에 생명이 없는 결과는 계속해서 아이들이 살해되고 있다. ‘죽임’을 당하고 있다.

내 안에 생명이 있다면, 이웃이 죽음을 당하는 고통을 보고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죽임‘을 당하는 이웃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며, 예수님의 고통이다. 사마리아 인은 강도를 만나 상처를 입고 죽게 된 이웃을 측은히 여겼다. 그래서 상처를 싸매주고, 살려주었다.

맹자는 인간에게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존재한다”고 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거나, 차에 치이려는 것을 보고 측은히 여겨 구해주는 것이 사람이다. 사마리아인은 산 영혼과 산 마음을 지닌 살아있는 생명의 사람이다.

측은함을 못 느낀 제사장과 레위인은 몸은 움직이나, 생명을 잃어버린 죽은 사람이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없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자세는 자기 본위의 삶을 조금도 벗어나지를 못했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오늘 강도만나 이웃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치는 짝퉁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지금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사는 세상은 혼자 살수 없다. 나 혼자 고집을 피우며 살려고 하기 때문에, 차갑다. 아니 상막하다. 생명의 존엄성도 없다. 그러면서도 주여! 주여! 부르짖는다. 그리스도인 부모에 의해 천국의 주인인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다.

나 혼자 살려고 하는데서, 나 혼자 행동하는데서, 모든 범죄와 인간 소외가 일어난다. 그것은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또 이 세상은 너와 나 둘이서 사는 세상도 아니다. 이런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죽고 넘어진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사는 세상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아 버린다. 결국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어 버린다. 나만 살려고 나를 중심으로 해서 사는 세상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박재순 교수는 “나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두고 나의 중심을 이웃에게 둘 때, 이 세상은 생명에의 길로 이끌리며, 생명이 지배하게 된다”고 자신의 저서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1988년, 도서출판 천지)에서 밝혔다.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삶과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삶을 열고 가정을 개방해서 상처받은 이웃을 맞아야 한다. 이것이 산 믿음이며, 생명을 위해 행동하는 사랑이다. 또 생명을 얻는 길이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사회는 강도만나 생명을 잃고, 상처받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아우성치고 있다. 이제 생명의 등불을 이들에게로 옮기자. 사회적 약자와 강도 만난사람들이 찬란한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을 볼 수 있도록 하자.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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