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지난호 계속)

또한 성경에서의 “죽은 자”가 일어난다는 등의 의미는 영혼과 육체가 분리 된 상태에서 영혼(靈魂)은 이미 거룩한 천국에, 몸은 땅에 보관되었다가 그 몸이 일어난다는 함의(含意)를 담고 음으로, 이는 곧 몸(육체)의 부활을 의미한다.(눅 241-12, 36-43. 마28:11-15. 요20:19-23. 21:12-14. 행 2:29-32, 10:39-41, 17:18, 고전 15:1-8, 12-19, 32-44, 51-54. 빌3:20-21. 골1:19-23.) 따라서 유교의 전통의식에서 말하는 죽음(사망)의 용어를 문화라는 관습에 따라 적용하게 되면, 성경의 가르침과는 충돌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새롭게 숙고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聖徒)와 믿지 않는 자와 다를 바 없는 죽은 자(사망한 자)가 되어 땅에 묻혀 있다는 오해를 낳을 뿐, 거룩한 안식(安息)과는 아무 상관이 없게되는 오해의 소지가 충분하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인 곧 성도(聖徒)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 되었을 때 임종(臨終 = 목숨이 끊어져 죽음에 이름)이라는 표현 보다는 영혼이 이미 거룩한 천국에 들어갔고, 그 몸은 성경이 증거 하는 바와 같이 “잔다”(살전 4:13-16) 곧 “성안[聖安 거룩한 안식(安息)] 상태에 있상례(喪禮) 용어 이대로 좋은가?는 다고함이 바람직합니다. 따라서 임종식(臨終式)은 성천입식(聖天入式) 곧 “거룩한 천국에 들어갔음에 대한 예식”이라 함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일부에서는 “천국환송식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미 이 땅에서 천국 백성으로 살다가, 거룩한 천국에 들어 가 안식 중임(하나님께 경배)”으로 “성천입식(聖天入式)”이라 함이 적절하다고 본다.

또한 입관식(入棺式) 곧 “시체를 관속에 넣음” 보다는 “몸을 관에 넣어(모셔) 둔다“”는 의미로 “관방재식(棺放在“式)” 이라 함이 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발인식[發靷式. 장례식(葬禮式)]은 “장례에서 상여가 빈소를 떠나 묘지로 향한다”는 의미이고, 장례는 “죽은 사람의 장사(죽은 사람을 땅에 묻거나 화장 함)를 지내는 일”이라 한다. 그리고 영결식(永訣式)이란 말도, “장례식 때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영원히 헤어지는 의식”을 말한다. 그러나 성도(聖徒)들에게는 “영원히 헤어짐”이란 없다. 따라서 ”잔다“(고전 15:18, 51)는 의미로, “몸이 거룩한 안식에 들어갔다” 해서, 성안식(聖安式) 이라 함이 가하다.

하관식(下棺식) 곧 “시체를 묻으려고 파 놓은 구덩이에 관을 내린다.” 하는 것보다는, 성경의 증거대로 “무덤에 넣어 둠” 곧 “안방재식(安放在式)”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중국어성경은 이에 대해 “무덤에 넣어 둠”(마 27:60 참조)을 “安放在(안방재)”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화환[花環. 조화(弔花 = 남의 죽음에 대하여 슬퍼하는 뜻을 드러내어 상주를 위문하는 듯으로 바치는 꽃)]의 리본의 글귀 역시 근조(謹弔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공손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슬픈 마음을 나타냄)라는 등 보다는, “부활의 믿음으로 소망을 갖고 위로 받자”, 또는 “부활의 소망의 믿음으로 위로 받자”라는 의미로 “부활신소망위(復活信所望慰)” 또는 부르기 좋게 “부활소망신위(復活所望信慰)” 라는 기록함이 좋다. 그리고 “남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조의(弔意)의 의미로 활용되는 조기(弔旗) 역시, 근조(謹弔)라는 기록을 바꾸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기타용어 등도 개선을 필요로 한다.

(57)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59)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60)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마 27:57-60)

한국장로교신학 학장/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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