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세상은, 우리가 다 함께 사는 게 세상이다. 나한테는 남의 일이지만 그 사람한테는 손톱 밑에 가시만 끼어도 아픈 거, 그게 세상이다. 남의 일이냐 내 일이냐, 남의 탓이냐 내 탓이냐, 그렇게들 사니가 우리가 이 모양인 거야, 남의 일이 아니라 그게 결국은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생각을 해야 하는 거다.” 우석을 바라보는 금화의 눈이 반짝인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건 혼자서는 안 되는 일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은 무릎 꿇고 살아서는 안 돼, 그렇게 해서는 살 수도 없고 그러니 싸워야 해, 싸워도 함께 싸워야 해.”

우석의 선명한 콧날을 바라보면서 금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놀래라,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 고개를 든 금화의 눈길이 우석에게 얽혀들었다. 금화의 입가에 웃음이 감돈다. “안아 주고 싶네.” “뭐?” 그녀가 일어섰다. “그동안 어디 갔다가 이제야 왔어?” “무슨 소리야?” “복도 지지리 없었네. 당신 같은 남자를, 내가 왜 이제야 만나는 거지, 그동안 어디 있었담.”

우석의 모습을 바라보며 금화는 자지러들 것만 같다. 금화의 마음 한편이 발바닥을 간질이듯 즐겁다. “남자들은 이 섬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지만, 우리도 제 발로 온 사람 없어. 속아 오지 않으면 수리한테 채인 병아리 꼴로 끌려 온 사람들이야, 분하고 원통하기로야 마찬가지지.” 함께 살고 싸워야 하는 게 세상이라는 이런 남자, 이 남자는 도대체 뭐람. 그러나 웃음이 사라진 우석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징용을 나와도 그렇지, 그쪽은 어쩌다 여기까지 왔어?” 그쪽이라는 말에 우석은 이 여자가 아직 내 이름을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 말 안 해줬던가?”

“했지. 그런데 술 먹고 들은 소리라, 최 씨라는 거밖에 생각이 나야지.”

“술을 마셔서가 아니라 마음에 없으니까 새겨듣질 않은 거겠지.”

“그때나. 이제나 술 먹은 나 야단치는 건 똑같네.”

우석이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우석이라… 내가 나이 맞춰볼까? 내가 말하는 거보다 세 살은 젊을걸.”

“그게 무슨 말이야?” “생각보다 늙어 보인다는 말.” 넌 왜 그렇게 늙어 보이니,

어려서부터 그런 말을 들었다. 늙어 보이는 게 아니라 그렇게 생긴 거예요. 굶고 살다보니 그렇게 된 거예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그 말이 솥뚜껑이 들리듯 가슴 밑바닥에서 비집고 올라온다. 그러나 우석은 안다.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그 말 때문만은 아님을 안다. 여자와 이렇게 가까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어본 기억조차 흐릿하도록 험한 나날이 흘러가지 않았나.(출처 : 한수산 장편소설. 군함도)

남녀의 연심(戀心)만을 보고 있지 않다. 지옥(地獄)섬 ‘하시마’에 끌려가 희망이란 사치스러울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죽지 못해 연명(延命)해 가는 목숨마저 야속하기만 한, 조선(朝鮮)의 남녀가 “우리”라는 마음을 주고 있다. 6월 호국 보훈(護國報勳)의 달에 들어선, 필자는 일제의 만행에서, “우리”를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작금에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한 재단 설립”을 두고 “치유금 이다. 배상금 이다.” 등 의견들이 분분하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가 어찌 고통을 당한 그 분들만의 아픔이란 말인가? 또한 “그 할머니들이 연세가 많아 시간이 없다”는데 그분들 모두 돌아가시고 나면 나라 잃은 굴욕, 치욕의 역사는 지워지는 것일까? 이는 공(功)에 급급해 “우리”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제의 만행에 의한 국치(國恥)임에도, 고통을 당하신 분들의 문제로만 해결하고자 함은 “우리”를 잊고 있지는 않은 것인가 해서 ‘느헤미야’의 눈물(느 1:3-4)을 떠올린다.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신 6:25)

한국장로교신학 학장/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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