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미쯔비시의 거대기업들이 자리한 나가사끼는 미쯔비시가 먹여 살리는, 일본말로 조오까마쩌(城下町)였다. 지상이 그것을 알 리 없었다.

재벌 미쯔비시와 일본 정부의 유착은 1874년의 ‘사가(佐賀)의 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을 무력침략하자는 안을 내세웠다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무사단(무사단)으로 총칭되는 정치가들이 귀향한 후, 그중 한 사람이 고향인 사가에서 반란군을 이글고 난을 일으킨다. 이것이 ‘사가의 난’이다. 이때 미쯔비시상회는 발 빠르게 2척의 배를 동원하여 반란군을 무찌르기 위한 정부군의 수송 임무를 맡앗다. 그 결과 미쯔비시는 막중한 신임을 받으면서 정부와의 결속을 두텁게 한다. 이어지는 일본 크고 작은 내란에서 정부군의 승리를 뒷받침했던 미쯔비시는 1876년 1월 정부로부터 특별한 지령을 받는다. 강화도조약을 체결에 대비한 전쟁준비였다. 회사 소속의 토오까이마루를 비롯한 12척의 기선을 이용하여 육군 4,600명. 해군 600명과 함께 군마 209필을 수송하라는 것이었다. 강화도조약 체결을 강요하기 위해 쿠로다 전권대사가 군함 6척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들어가면서, 만약 이 조약의 체결을 조선이 거부, 저항할 경우에는 무력으로 제압하겠다는 복안이었다.

정부의 지령에 따라 미쯔비시 측은 병사 3,000명을 태우고 쓰시마에 집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대기 중이던 군대를 움직일 필요도 없이 강화도조약이 쉽게 체결되면서 미쯔비시의 군수 수송체제는 3월 말로 해제되었다.

조선을 위협하기 위해 쓰시마에 군대를 집결시킨 이 일련의 사태는 미쯔비시와 정부의 밀착은 물론 기업으로서의 성장에 결정적 게기가 되었다. 정부와 견고한 협조 속에서 미쯔비시는 군수품 수송을 독점하면서 전쟁과 함께 성장한다. 해운업 조선업 중공업은 물론 타까시마와 하시마 탄광산업까지,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미쯔비시는 단기간에 재벌이란 거대한 성채를 구축해냈던 것이다..(출처 : 한수산 장편소설. 군함도)
조선(朝鮮)의 젊은이들은 지옥섬 ‘하시마’에 강제연행. 강제동원 등의 방법으로 끌려가, 일본 정부와 미쯔비시의 착취에 시달리며 죽어 갔고, 오직 그들의 탐욕에 의한 전쟁 도구로 이용되었다. 그 후 전쟁에 패전한 일본은, 북괴의 남침에 의한 육이오 발발로 또 다시 전쟁에 의한 부를 축적하는 계기를 마련,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사무라이가 무엇인가 전쟁하는 자들 아닌가? 그들은 끊임없이 침략해 왔고, 제 2차 대전의 전범 국가이기도하다. 따라서 일본의 기업들은 전쟁으로 성장하였다라고 한다면 무리일까? 그들은 우리에게 이루 헤아릴 수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음에도, 이제는 독도를 자기 내 땅이라고 주장하며 또다시 전쟁의 기회만을 엿보는 것 같다.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떠한가? 고급관료 까지 "나는 친일파(親日派)다" "할아버지가 일제시대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마지막 사장 이었다" "일본은 어머니의 나라다"라는 등의 발언을 비웃듯이 당당하게 늘어놓기 까지 한다니,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하기야 포항제철 등이 전범기업(戰犯企業) 미쯔비시의 도움을 받아다는 주장도 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꼭 미쯔비시 등이 아니면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이룰 수 없었을까?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고문하고, 죽였는가. 어떻게 우리 것을 착취 하였는가 등을 조금만이라도 생각했다면”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처음부터 잘 못 놓인 돌로 인하여, 이제 우리는 후 세대들을 걱정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북으로는 북괴, 동으로는 일제, 서로는 중국 등을 상대해야 하는 우리는 북괴 타도를 제외하고는, 별반 대책이 없어 보여 답답함 마저 든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한국장로교신학 학장/ 본지 논설위원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