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베드로가 잔뜩 고무돼서 예수께 물었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면 어떨까요?” 예수께서 하신 대답이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인간 역사에서 가장 위협적이고 파괴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가 죄 용서의 문제이다. 인류 역사는 죄의 보복 청산을 반복해왔다. 지금도 이 악순환의 유혹은 끈질기다. 그리하여 주기도에서 가장 실천하기 어렵고, 오용하기 쉬운 기도가 바로 죄 용서에 대한 기도이다. 돌이켜 보면 죄 용서를 거부하는 행위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결국 인간은 죄의 소멸을 원하면서도 죄의 무거운 짐을 벗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빚진 자로 인식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가운데 있지 않은 것이다.”(요일 1:8-9) “나를 굽어보소서. 고통 받고 불쌍한 이 몸입니다. 나의 죄를 말끔히 씻어 주소서.”(시 25:18) 그리스도인에게 죄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지만, 결과는 자신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감당하겠다는 각오와 책임성에 대한 표현이다. 독일과 일본의 전후처리에 대한 태도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죄 고백은 성숙한 인간이 지닌 태도이다. 아니, 인간은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성숙한 인간이 된다. 죄의 뿌리는 깊다. 죄는 피를 뿌리게 하고, 심장을 도려내게 하고, 피눈물을 쏟게 한다. 때문에 죄는 반듯이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한다. 우리가 죄 용서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용서를 부정하는 행위요, 무엇보다 지속 가능한 생명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원한다면, 우리 또한 이웃에 대한 죄 용서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북한의 5차 핵실험으로 인한 우리 안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우리도 핵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여권에서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평양을 초토화 시키겠다’는 말도 나온다. 상당수 한국교회도 이에 가세하는 분위기다. 과연 핵이 무엇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인지 궁금하다. 대화는 한사코 부정하고, 대결로만 향했을 때의 결과는 자명하다. 이 자기파멸적인 분노의 뿌리가 어디이겠는가? 상대를 악마로 규정하고, 죄 용서를 부정하는 자기 내부에 있는 게 아닐까?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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