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성 택 목사

어제(9월 27일) 서초동 예술의 전당 컨수트홀에서 안익태 기념재단이 주관하는 오케스트라 컨서트가 있었다. 익히 아는 분이고, 장소 또한 유명한 곳이라 관람에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으나, 시종일과 필자의 눈을 붙잡는 역할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트라이앵글과 챔버린과 대북을 연주하는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해 그 거대한 오케스트라에서 그들의 역할은 미미하고 보잘 것 없어 보였지만 필자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트라이앵글은 그 미미한 모양에도 불구하고 결코 작지 않는 낭랑한 타음이 전체 화음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묘한 선율을 살리고 있었고, 챔버린은 적소에서 치열한 파열음을 던짐으로 연주를 장엄하게 하였고, 몇 차례에 불과한 대북의 웅장함은 코리언 판타지의 위엄을 살리고 있었다. 지휘자의 손끝이 그들을 향할 때 마다 정확하게 전체의 화음에 합류하며 오직 그들만이 낼 수 있는 독특한 음색과 파장으로 컨서트의 품격을 높이고 있었다.

그 순간 왜 필자의 뇌리에 대통령님과 국회의장님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한걸음 더 나아가 국정에 힘드실 텐데 괜찮은 오케스트라 컨서트 표라도 보내드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의 이유가 “딱해 보인다.”는 것이었다면 너무 무례하다고 책할지 모르겠지만 요즈음 두 분을 보면 딱해서 못 보겠다. ‘다움’은 모든 존재들의 윤리적 핵심이다. 존재가 존재다워야 존재 가치가 있다. 대통령이 대통령다워야, 국회의장이 의장다워야 그들의 윤리성이 확보되고 존재해야 할 이유와 가치가 설명된다.

그러나 요즈음 그들에게서 도무지 ‘다움’의 가치를 발견하기가 힘들다. 두 자리는 지극히 정치적이다. 비록 원칙이 정치의 근본이지만 생물처럼 움직이는 변화무쌍한 정치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유연함은 정치의 덕목이다. 원칙만 있고 유연함의 덕목이 없는 정치를 독재라 하고, 그 독재의 주체가 악이라면 그들의 정치를 폭정이라 한다. 필자는 대통령의 원칙을 존중한다. 그러나 왜 그 분에게서 유연함의 덕목은 발견할 수 없는 것일까?

권력과 맞선 원칙, 집권당과 맞선 야당의 원칙은 존경받고 추종받지만, 그들의 유연함은 유약함으로 비난받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권력자와 집권당의 원칙은 존중받지만, 그 원칙을 절대 권력의 힘으로 밀어 붙이면 우리는 그것을 오만이라 부르고 불통이라고 평한다. 지금 자신의 원칙에 충실한 대통령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여기에 있다. 국회의장의 소신은 과욕 정도가 아니라 금도를 넘어서고 있다. 그 소신은 원칙도 아니고 덕스러운 것도 아닌, 오만스러움에 나르시즘까지 결합된 소아적 영웅주의에 불과하다. 국회의장의 정치는 그다운 품격과 급수가 있어야 함에도 우리가 보는 것은 여전히 야당 투사 정세균일 뿐이다.

필자가 본 오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뒷줄 맨 끝에 도열한 트라이앵글과 챔버린 그리고 대북 연주자들을 적소에서 놓치지 않았다. 그는 별로 의미 없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작고 미세한 음에서부터 최상의 연주가들이 쏟아내는 크고 웅장한 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흩어짐이 없이 자신의 손끝으로 모아들였다.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퍼스트체어는 물론이고 전 연주자들과 합창단들의 소리들이 모인 손끝에서 웅장한 화음으로 변한 감동이 관중 속으로 뿌려졌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오케스트라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필자는 소망한다. 우리의 대통령은 민심이 들려주는 정직한 이야기가 비록 자신의 원칙에는 맞지 않더라고 받아들여주는 권력자의 진정한 힘을 보여 줄 것을 소망한다. 우리의 국회의장은 국론화합의 멋진 화음을 들려주는 정치 지휘자가 될 것을 소망한다. 정치는 보여줌이지만 멋이 있어야 하고, 들려지지만 감동이 있어야 한다. 그 멋과 감동이 있을 때 내가 태어난 이 땅이 사람 살만한 나라요, 지켜야 할 아름다움이 있는 나라임을 기뻐할 것이다.

그리스도대학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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