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SBS TV에서 ‘갑순이’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시청한 내용은 이러하다.

한 중소기업 사장이 외국 외사와의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재혼한 부인과 만찬에 참여하게 된다. 그 때 그 중소기업 사장을 잘 아는 여인들은 그의 부인에게 의혹과 비웃음의 눈길을 던진다. 이상한 기류와 분위기 속에서 왠지 먹먹한 마음에, 살며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홀로 외로움의 시간에 묻혀 있는 그는 급박한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왠 외국인 여인이 수영장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지 않은가! 이 때 그는 앞 뒤 돌아볼 틈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든다. 그러나 그에게는 물에 빠져 죽어가는 외국인 여자를 구할 능력이 없었다. 그 이유는 수영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죽어가는 여인을 구해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물속으로 뛰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외마디소리로 질렀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그는 살기 위해 사력을 다해 외쳤다. 그 소리에 연회장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이상한 광경에 놀란 사람들은 외국인 여인과 갑순의 언니를 수영장에서 끌어내어 생명은 구하게 되었다.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갑순의 언니에게 조소의 눈길과 함께 비난을 쏟아낸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갑순의 언니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더구나 그의 남편은 아내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에 분노를 표한다. “수영도 못하면서 왜 뛰어들었어? 중요한 계약을 따 낼 수 있는 것을 당신 때문에 잃어 버렸잖아!”하며 아주 보기 싫다는 표현을 한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오직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러나 사건은 반전 된다. 다음날 몇몇의 외국인들이 찾아 와서 중소기업 사장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계약을 하자고 한다. 그 감사의 이유는 “자기의 아내는 말을 못하는데, 당신의 부인이 소리를 질러 주어서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신앙이 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에 목적을 두고 기도하는가?”라는 생각을 해 보면서, 우리 주변에는 자식들을 잃고, 아버지를 잃고 통곡하는 사람들, 힘이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해서 울분 하는 사람들, 취업을 못해 남들의 따가운 눈총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가진 것이 없어 아파트 경계의 벽의 뒤에서 비애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가난해서 아침에 눈을 뜨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사람들 등,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사연 속에 외로움과 두려움에 홀로 소리 없이 슬픔의 눈물을 훔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함께 걷고, 함께 이야기 나누며,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지도 못하며, 아무 위로도 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생명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복지를 해야 한다! 등을 외치지만, 마음의 중심이나 행동으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격멸, 조소, 냉대를 쏟아내고 있지 않은가? 그 모든 섬김이란 것들조차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일 뿐이지는 않은가? 그러면서도 우리는 생명을 위해, 복음전도를 위해, 모여 부르짖어 기도도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갑순의 언니가 물에 뛰어든 것과 같은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을까? 아니? 도리어 소름이 끼칠 정도의 저주스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 던지면서도, 그 저주의 마음은 기도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을까? 내 고향사람들이 아니기에,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아니기에,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이 아니기에, 나는 그들에게 냉소와 비웃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자라면 차라리 “기도하지 마라!” 그런 자의 기도는 필요 없다! 그런 기도는 위선이요, 우상숭배로, 도리어 하나님을 모독할 뿐이다! 진정으로 기도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복을 누리는 기도를 하자!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 : 9-14)

한국장로교신학 학장/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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