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둘째는 신사참배를 문제를 회개하면서 교회를 재건하는 방법과 주체를 놓고서 당시 교계지도자들이 서로 갈라서는 교단분열이 일어나고 말았다. 신사참배를 찬성했거나 동조한 목사들과 장로들의 복권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1945년 9월 2일, 부산에서 20여명의 목사와 장로들이 교회재건운동을 주도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9월 18일에는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 등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경남노회를 재건하였고, 12월 3일 마산문창교회에서 경남노회 제 47회 정기노회가 열렸다. 경남노회는 재건방안을 놓고서 3그룹으로 분열되었다. 철저한 회개를 부르짖는 한상동 목사를 따르는 자들, 교권주의에 의지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김길창 목사를 따르는 자들, 온건 중도파로 분류되던 심문태 목사를 따르는 자들이 각각 나뉘어진 것이다.

결국 한상동 목사와 한부선 선교사 (Bruce Hunt)를 따라가려는 무리들이 경남노회 안에서 분열하였다. 이미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라는 체제에 속해있던 인사들은 여전히 기득권을 유지하기를 원했고, 대부분 교회의 지도층은 신사참배와 관련이 있었던 처지였다. 그래서 출옥한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내놓는 복구방안과 회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를 않았다. 출옥 성도들이 제시한 복구방안은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합당한 권징과 절차라고 생각되어지지만, 그런 정서를 갖고 있는 분들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아직까지도 후손들마저 이 문제에 관해서는 서로 의견을 달리하면서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1945년 11월 14일, 박형룡 박사가 다음과 같은 한국교회 재건 방안을 발표하였다.

1. 교회 지도자 (목사 혹은 장로)들은 모두 신사에 참배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정화한 후 교역에 나갈 일.
2.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자복할 것.
3.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4. 교회 재건의 원칙을 전국 각 노회 또는 지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이것을 실행케 할 것.
5.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이 방안이 발표되던 평북노회 등 6개 노회가 교역자들의 모임석상에는 홍택기 목사도 여전히 참석하고 있었는데, 그는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해외에 피난생활을 한 사람보다도, 신사참배의 굴욕을 참아가면서 교회를 지킨 사람이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가진 자들과 교권을 장악한 세력이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총회전체가 배교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회개하고 다시 재출발한다는 과감한 회개운동이 전개되지 못하고 말았다. 세속정권에서도 식민지 지배 세력을 청산하지 못하고, 대한민국 건국 후 이승만 정부시대에 일제 압정에 동조한 세력들이 기득권을 유지하여 명예와 권력과 재력을 차지한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

해방되던 해부터 시작된 경남노회의 처리 방안은 한국교회의 회개와 복구방안에 대한 것으로 오랜 시간을 끌면서 총회의 핵심주제가 되고 말았다. 한국장로교회는 해방 이후, 남한 땅에 있는 교회들만의 남부총회를 개최하여, 1947년 제 32회기에 “제 27회 총회에서 결의한 신사참배라는 배교를 취소하는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1951년 5월 24일, 제 36회 총회에서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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